◎문화마인드 없는 공무원들이 운영 ‘칼자루’/1년예산 맞춰 공연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대부분 교통불편하고 휴게시설도 부족예술활동의 메카가 돼야 할 공연장이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관료적 틀에 묶여 활기를 잃거나 훌륭한 시설마저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1년에 단 한 번도 예술현장을 체험하지 못한 국민이 80%가 넘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최근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예술단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창단공연을 알리는 전단을 만드는데 결재도장을 16개나 받아야 했다. 전단제작비는 장당 120원. 공연 준비만도 바쁜 판에 껌값도 안 되는 돈을 타내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뛴 예술감독은 의욕을 잃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란 피곤한 일이다. 결국 공연장 운영의 칼자루를 쥔 관리들과 싸우다 지쳐서 실적 때우기로 만족할 수 밖에 없을 것같다. 그렇게 준비된 공연이 관객을 감동시킬리 없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연장은 대부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극단, 창극단, 무용단, 합창단 등 7개 전속단체를 거느린 국립중앙극장은 최근 들어 단체별 예술감독제 도입, 홍보 강화 등 체질개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운영주체인 관료집단의 속성상 민간단체에 비해 활력이 떨어진다. 지방은 사정이 더욱 열악하다. 전국에 44개의 지방문예회관이 있지만 연중 가동률은 평균 30%를 밑돈다. 조명기사 무대감독 등 공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문인력도 없어 국민의 혈세로 건립된 시설을 놀리다시피 하는 곳이 많다. 공연 없는 공연장은 죽은 공간일 수 밖에 없다.
이에 비해 독립법인인 서울 예술의전당은 운영의 자율성과 전문인력은 갖췄지만 오케스트라 등 전속단체가 없어 자체공연을 제작할 수 없는 불완전한 상태로 운영된다.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음악당과 오페라하우스가 자체 공연보다 대관으로 채워진다. 국내 유일의 오페라하우스내 오페라극장에서는 오페라보다 악극과 뮤지컬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세종문화회관은 실패한 문화행정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78년 개관이후 관장자리는 정년퇴직을 앞둔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휴게소였고 역대관장의 평균 재임기간은 11개월 밖에 안된다. 운영 활성화를 위해 관장을 민간전문인으로 앉히겠다던 조순 전 서울시장의 공약은 그가 정치권으로 떠나면서 증발해버렸다. 그 바람에 가장 큰 피해를 본 단체가 세종문화회관의 9개 전속단체 중 가장 식구가 많고 대표적 위상을 지닌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없이 2년째 표류하고 있다. 외국인을 영입하려 했으나 추천·임명권을 가진 관장·시장이 모두 직무대리여서 결정이 미루어지는데다 IMF 한파까지 겹쳐 계획이 무산됐다.
세종문화회관은 교향악단 외에 합창단, 극단, 무용단 등 9개 전속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 단체는 공연을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다. 공연에 맞춰 예산을 짜는 게 아니라 예산에 공연을 끼워 맞추기 때문에 수준높은 무대를 준비하기 어렵다. 그나마 예산도 1년단위로 책정돼 장기계획을 세울 수 없다. 주어진 예산을 남기면 다음 해 예산이 깎이고 벌어봤자 시수입으로 들어가 굳이 좋은 공연으로 손님을 모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객석의 절반도 채우기 어렵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은 183억원의 예산을 썼지만 공연수입은 13억원에 그쳤다. 1∼2회 정기공연으로 한 해를 넘긴 단체도 있다. 소속 예술가들은 자연히 의욕을 잃고 개인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시민을 위해 세금으로 지어진 문화공간이 시민도 예술도 뒷전이고 관료주의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공연장은 한 나라 문화수준의 척도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 영국 런던 바비칸센터,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등은 예술의 요람이자 자랑스런 문화상징물로 외국관광객이 즐겨 찾는 세계적 명소가 되고 있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국립중앙극장은 한국문화의 얼굴이다. 그러나 이들 시설은 속병을 앓는데다 찾아가기 조차 어렵다. 예술의전당은 8차선 도로와 우면산으로 막혀 있는 「섬」이다. 전철에서 내려 셔틀버스로 갈아 타거나 10분 이상 걸어서 지하도를 건너 상륙해야 한다. 국립중앙극장은 남산 속에 틀어박혀 산 아래 전철역에서 택시를 타거나 10분 이상 걸어 올라가야 한다. 즐겨 찾기란 애초 틀렸다.
그래도 관객은 고생을 무릅쓰고 찾아 온다. 좋은 공연은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애써 찾아가도 고생이라는 점이다. 6시간짜리 창극 춘향전이 공연된 지난 달 14∼27일 국립중앙극장 대극장. 연일 만원을 이룬 이 공연에서 중간휴식시간의 로비는 북새통이 되었다. 사람은 넘치는데 아래층 식당 외엔 달리 음식 먹을 곳이 없어 관객들은 의자, 계단, 맨바닥 여기저기 쭈그리고 앉아 요기를 하거나 춥고 비오는 날 밖에서 떨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예술의전당도 마찬가지다. 공연중 휴식시간에 커피 한 잔을 마시려면 화장실 가는 건 포기해야 한다. 긴 줄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느라 시간이 다 가버리기 때문이다. 서비스 부재도 공연장을 더욱 멀게 만든다.
공연내용도 서비스도 불만족스런 공연장. 누구나 즐겨 찾고 예술의 향기를 맡고 가는 오아시스는 아직도 먼 훗날의 꿈일 뿐인가. 사랑받는 공간으로 공연장을 살리려는 노력이 아쉽고 절실하다.<오미환 기자>오미환>
◎외국의 공연장 운영사례/정부간섭 없다
한국처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연장을 직영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세금으로 건물을 짓고 재정을 지원하지만 운영은 민간에 맡기고 있다. 지원수준은 연예산의 50% 이상. 문화나 복지부문의 예산축소로 재정지원이 감소하는 추세에 따라 공연장과 예술단체마다 마케팅등 관객에 가깝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국립극장은 특수법인이다. 국고 500억엔(약 6,500억원), 민자 100억엔의 기금으로 조성된 일본 예술문화진흥회의 지원을 받는다. 100% 국고로 운영되는 우리나라 국립극장과 다르다. 전속단체 없이 민간단체를 유치해 공연하는 점도 다르다. 일본국립극장은 가부키(가무기), 분라쿠(문락), 노(능) 등 전통예술만 공연한다. 객석점유율은 70%선. 대신 지난해 10월 개관한 일본 신국립극장은 오페라 클래식 연극 등 현대예술을 위한 공간이다. 극장별 특성화, 민자유치 등은 최근 민영화가 거론되는 우리나라 국립중앙극장이 참고할만 하다.
미국의 공연장과 예술단체는 좀 더 시장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오페라 같은 명소는 관광객 수입만도 엄청나지만 지방오케스트라는 파산위기를 겪기도 한다. 때문에 재정자립을 위해 기업 등의 후원을 얻고 관객을 끌어 들이는 등 예술경영개념이 발달해 있다. 낮시간 공연장의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개방하거나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관객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많다.
중국 베이징(북경)시예술단은 시에서 50∼100% 지원을 받는다. 특히 전통극인 쿤쥐(곤극)는 민족문화 육성차원에서 100% 지원한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국가보다 지자체의 역할이 더 크다. 프랑스의 경우 각 지자체의 문화예산총액은 문화부예산의 3배에 이른다. 독일의 국·시립극장은 60여개. 국·공립기관이라도 정부의 간섭은 없다.
공연장을 비롯한 문화공간의 확충방안에 대해 이철순 예술의전당 홍보출판부장은 「문화특구」 조성을 제안한다. 공연장 영화관 전시장 미술관 예술학교 작업장 등을 한 군데 모으자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복합문화공간 「아크로스 후쿠오카」는 좋은 보기가 될만 하다. 후쿠오카(복강)시가 민자를 유치해 지상 14층 연면적 3만2,000평에 조성한 이 공간은 연주홀, 전시실, 영상·문자정보관, 회의실 등을 갖춘 국제적 문화센터이면서 호텔, 쇼핑센터, 식당가 등 편의시설과 연결돼 주민생활과 깊숙히 통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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