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으로 도산 탄신 120주년을 맞는다. 게다가 10일은 도산 서거 60주년 기일이다. 열정의 민족주의 사상가로 일생을 오로지 독립운동에 바친 도산 안창호의 말년은 형극의 도정이었다. 1932년 4월29일 상하이(상해) 훙커우(홍구)공원 거사직후 일제 관헌에 체포된 그는 그해 6월7일 인천으로 호송돼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7월25일 예심 회부때까지 호된 심문을 받았다. 10월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4년의 실형이 선고됐으나 공소권을 포기하고 서대문과 대전감옥에서 2년6개월을 복역하였다.도산은 형기 22개월을 남기고 가출옥됐으나 엄중한 일제관헌의 감시를 받았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지방을 순회하고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하면서 은밀히 흥사단의 국내조직인 「동우회」를 지도, 최후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1937년 6월28일 서울에서 동우회 사건이 발생하였다. 191명에 달하는 관련인사가 거의 체포되었으며 그는 최고지도자로서 평양에서 활동하던 단우들과 함께 체포돼 악명높던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그는 인간성이 무시된 취조실에서 심문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도산은 민족운동 내지 독립운동에 관련된 모든 사업을 하나같이 귀중하게 여기고 정직·성실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그가 독립운동의 완전무결한 준비를 뜻하는 「민족전도대업의 기초」로서 가장 소중하고, 더욱 성실하게 추진한 사업이 1913년 5월15일 8도 대표를 뽑아 조국광복을 위한 인재양성기관으로 결성한 흥사단사업이었다.
처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중앙단소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으나 곧 한인이 많은 로스앤젤레스로 무대를 옮겼다. 그후 도산은 3·1운동을 계기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부터 중국대륙은 물론 남북만주와 일본 및 러시아 연해주 지방까지를 범위로 하는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 흥사단운동을 원동까지 넓혀갔다.
이어 그는 흥사단 단우인 김항조 이광수 박현환 주요한 등으로 하여금 국내에서 조선인 대중에게 흥사단운동을 펼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초 국내에 첫 흥사단 조직인 「수양동맹회」가 결성되었으며 이어 평양에도 「동우회구락부」를 조직,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두조직은 곧 통합되어 「수양동우회」로 개편되었고 1929년 11월에 이르러서는 더욱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활동을 위하여 「동우회」로 확대되어 동맹수련보다는 청년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등을 통한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강화시켜 나갔다.
도산은 동우회활동을 하던 중 국내로 압송되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동우회를 현지에서 지도하게 되었다.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도산은 동우회와 관련, 심문을 받을때 「민족전도의 대사업」이라고 명시된 흥사단 내지 동우회 약법 종지를 「조선민족독립의 대업」을 뜻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대사업의 기초」란 「민족독립의 기초」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도산은 국내에 압송될 때부터 소화불량이 생겨 몹시 쇠약한데다가 재수감중 폐질환이 도졌고 거기에 간경화증이 겹쳐 재기불능의 중태에 빠졌다. 총독부당국은 할수 없이 그해 12월2일 보석으로 풀어줬으며 도산은 경성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중에는 문병도 극도로 제한되고 친형 안치호등 가까운 친족 몇사람만이 겨우 간병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도산은 그래도 해는 넘겨 1938년 3월10일 낮 12시6분 그렇게 염원하던 조국광복을 못보고 운명하였다. 총독부당국은 도산 사후에도 민심의 동요를 꺼려 일체 보도를 못하게 하였고 장례도 고향 선산 대신 3일장으로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간략히 치르게 하였다.
12일 오후 1시30분 대학병원 영안실에서 불과 15분동안의 영결식을 마치고 오후 3시30분 운구차가 망우리 묘지에 도착, 서둘러 하관식을 마쳐, 30분만인 4시에 매장을 끝냈다. 장례식 참석자도 친형제간인 치호 신호씨등 7명의 친족과 2명의 교인들 뿐이었다.
도산의 말년은 이렇듯 최후까지 간난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역사의 지표가 되었고 그의 행적은 민족수난을 극복하는 실천강령이었다. 무한경쟁의 21세기를 준비하는 도정에서, 더욱이 금융환난을 헤쳐가는 시점에서 도산의 사상과 행적은 귀감이 아닐 수 없다.
해방후 강남에 도산공원이 조성되었고, 망우리 묘지의 유해를 모셔와 영원한 유택이 마련되었다. 근래 그 공원내에 도산의 헌양사업을 주도할 도산기념관건립운동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도산의 애국적 생애와 숭고한 유훈을 밝힐 「학도산(도산을 배우자)」의 새 풍조가 조성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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