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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친구 조중건 부회장(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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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친구 조중건 부회장(한국의 추억)

입력
1998.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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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내 털어놓는 ‘신뢰의 상징’/박 대통령 적자항공사 인수타진에 “회생” 장담/“정치자금 지원압력 불만” 얘기할 정도로 신의/부임비행기 좌석승급 등 한국생활의 ‘시작과 끝’미국 대사는 많은 이점을 누리는 자리다. 한국에서는 물론 이와 관련해 오래전부터 이런 저런 의문과 이견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지만 말이다.

서울 외교단의 일부 동료들은 여기에 덧붙여서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여겼다. 한반도 안보를 미국에 의지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경제와 통상 문제에서 불공정한 편의를 미국 정부에 제공한다는 설명이다.

나는 종종 그들에게 미국은 이 외에도 또다른 중요한 혜택을 보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과학과 경제 엔지니어링 통신 저널리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석사과정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문의 전당 역할을 해왔다. 전세계 대다수 국가들이 이런 혜택을 받았지만 한국은 이 부문에서 단연 선두였다.

나는 주한 미 대사를 지낼 당시 한국 정부의 고위 관료중 미국 대학에서 석사나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의 비율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는 점을 지적했다. 심지어 미국 정부보다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이처럼 중대한 관계가 때로는 무시되는 경우를 보았다. 안보와 관련된 사건이 여론의 관심을 받을 때는 특히 그랬다.

한국전 직후 한때 미 국제개발국(AID) 프로그램 지도자들은 한국인들이 양측 사이에 맺어진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AID의 지원하에 특정 프로젝트들을 마련했다. 이들 프로젝트는 때로 한국인들보다 미국의 우선과제와 입맛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흔했다.

한국인들은 가끔 기금을 다른 목적에 사용했다. 그들이 시급하다고 여긴 핵심중 하나는 똑똑한 젊은이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내 석사과정을 밟게하는 것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장기적 미래를 고려할 때 그들이 매우 현명하고 실용적이었다고 믿는다.

학자 출신이라서 나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 친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에 따라 나는 한국 체류중 자연스레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들의 본질을 따라잡을 수 있게 해주는 별도 라인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아내 세니와 나는 매년 12월 예일대 동창회에 즐겁게 참석, 다양한 주제를 놓고 자유로운 토론을 즐겼다. 당시 예일대 동창회장은 이홍구 박사가 맡았다. 그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50년대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학술회의를 계기로 나와 가깝게 된 학자중 상당수는 전두환 정권에서 요직을 꿰차고 있었다.

또 재계와 업계로 진출한 사람도 많았다. 조중건(일명 찰리) 한진그룹 부회장은 나와 각별한 사이다. 그는 50년대와 60년대 학술 교류를 통해 한국 친구들과 쌓게 된 신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서울에 도착한 날부터 시작된 나의 한국 이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지미 카터 미 행정부 시절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던 홍보정책의 일환으로 모든 미국 관리들이 항공기를 탈 때 「투어리스트 클래스」를 이용했다. 아내 세니와 나도 81년 7월말 서울에 부임할 당시 투어리스트 클래스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도쿄(동경)에 도착했다. 우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때는 도쿄에서 서울을 운항하는 항공사가 대한항공밖에 없었다. 전통적 외교의례와 예의에 밝았던 찰리는 우리 부부의 좌석 등급을 높여 주었다.

당시 다른 나라 외교관의 경우에는 2등 서기관들도 항공기를 탈 때 1등석을 이용했다. 때문에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이 우리 외교관들을 소홀히 대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을 낳게 됐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같은 지적을 받고 대사와 부대사에 대한 정책을 바꾸었다.

조중건 부회장은 한국 친구들과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지닌 가장 훌륭한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재능과 일에 대한 열정이 적절히 조화된 인물이다. 형인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보다 12세 어리다. 그러나 많은 점에서 그는 대한항공을 국제적 기업으로 발돋움시키는데 엔진의 점화플러그 같은 역할을 했다. 찰리는 60년대 미군과 복잡하기 짝이 없던 베트남에서의 병참 문제를 다루는데 협력했다. 미국의 속어에 익숙하고 의사소통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미군 지도자들의 신임을 얻게 됐다. 그는 미군들을 도와 베트남 항구에서 화물선들의 하역 문제를 해결해 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는 한미 양국 협력증진에도 이바지했다.

오늘날에는 한국 안팎에서 재벌과 재벌총수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나는 재벌을 무조건 일반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찰리 같이 재벌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발전에 영웅적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한국인들의 특성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사람이다. 그는 예리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조직력이 뛰어나다. 유머감각이 탁월하고 모험심과 상상력도 풍부하다. 특히 솔선수범해서 힘든 일을 도맡아 자연스레 동료, 부하직원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낸다.

조 부회장은 또 전통적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녀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자녀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쌍둥이 딸은 음악재능을 타고 났는데 둘 다 외국 유명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한명은 유럽 스트라스부르그 학교를, 또 한명은 미국 줄리아드대에서 실력을 쌓았다. 독일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하는 그의 아들도 아버지의 자부심에 걸맞게 훌륭히 성장했다. 그리고 나는 찰리가 세니에 대해 존경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와 각별히 가까운 사이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찰리는 현재 한진그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제는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분교 재학시절과 미국인들과의 사업, 업계에서의 활약 등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말할 때도 됐다. 한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찰리 형제에게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 항공사를 인수하는게 어떠냐며 의중을 떠보았다. 그러자 두 형제는 회사를 살릴 자신감이 있다고 장담했다.

대한항공은 오늘날 승객과 화물 양면에서 일류급 국제항공사로 성장했다. 찰리는 84년 대한항공 사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는 초창기 시절부터 이 회사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재능 많은 친구와 사귄 덕분에 한국의 가족과 기업들이 대를 물려주는 패턴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나는 대사 재임시절 찰리와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누렸다. 우리는 83년 5월 그가 책임졌던 미 공군 전투기의 수리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부산 외곽의 김해공항을 들른 적이 있다. 그 때 우리는 한국형 헬기 조립과정도 관찰했다. 그 무렵에는 그가 예비역 미 공군 장교인 내 동생 밥과 그의 아내를 초청, 접대하기도 했다. 대한항공은 자체의 호텔과 캐터링(여객기 등의 음식제공 업무) 사업도 벌이고 있었다. 내 아들 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우리는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KAL호텔에 머물곤 했다. 대한항공은 이 호텔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훌륭한 광천수를 발견했는데, 찰리는 이 물을 병에 담아 팔기로 했다. 찰리는 내게 자신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기막히게 냄새맡을 수 있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수긍했다.

당시 재계 지도자들은 청와대에서 내려오는 독단적인 지시나 명령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국제 외환시장의 흐름과 역행하는 통화운용과 관련된 지시는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74년초 찰리는 달러를 일본과 한국으로 옮기는 문제를 놓고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은 적이 있다. 한진그룹은 수시로 정치 활동을 지원하라는 압력도 받았다. 이 때문에 찰리는 믿을 만한 친구들에게 이런 정치 행태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찰리와는 서로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믿을 만한 사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신의를 결코 저버린 적이 없다.

전두환 정권시절 많은 재벌 총수들은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찰리는 당시 테니스를 스폰서했다. 올림픽 기간에 한국 정부는 역대 미국 대사들을 초청했는데, 내 전임자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와 세니는 그러나 찰리와 테니스를 치는 등 정말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우리의 우정이 긴밀한 협조로 이어졌던 몇 가지 경우를 설명한 바 있다. 소련이 항로를 이탈한 KAL 007기편을 격추시켰던 83년 9월1일 이른 아침 찰리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나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파티를 열 때마다 항상 찰리를 초청했다. 그는 얘기 보따리가 무궁무진했다. 미국인 정치가와 사업가들도 찰리가 정보에 밝다는 점을 간파하게 됐고, 한국에서 사업하는데 유용한 조언을 받았다. 아내는 우리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할 경우 종종 『찰리도 손님 명단에 있는 거지요』라고 묻곤 했다.

우리가 짐 톰슨 일리노이주 지사를 대사관저 만찬에 초청했을 때 찰리는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시카고 오헤어 공항이 있는 일리노이주 지사답게 톰슨은 찰리와 항공산업 등을 주제로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다. 항공 사업에 몸담은 덕분에 찰리는 모든 대륙을 여행했고 중동과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한미 관계와 관련된 문제점들에 두루 정통했다.

내 임기중에도 한국과 미국 업계의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미국이 외국 항공기의 수를 제한하고 미국 항공사에 특권을 주는 예도 있었다. 당시 대한항공은 미국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시카고 노선을 「전세 항공」으로 등록했다. 정기 항공 서비스는 승인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리는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틈만 나면 불만을 제기했다. 그럴 때면 나도 한진그룹이 김포공항에서 화물 서비스 등에서 독점을 누리고 있는데, 이는 불공정한 처사가 아니냐고 응수했다.

대사 임기를 마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은근히 찰리가 방문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내 우리집을 찾아왔다. 우리는 함께 골프를 쳤다. 나는 그 때 골프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들려주고 싶다. 컬럼비아에 있는 골프장에서 경기를 시작할 무렵 찰리는 골프장 도면을 훑어보고는 정말 쉬운 코스라고 말했다.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18홀중 6번째 홀에 이를 때까지 찰리는 내 아내보다도 점수가 뒤졌다. 그러자 그는 『딕시(워커 전 대사 애칭), 이 골프장 코스는 정말 어렵네요』라고 토로했다.

내가 대사임기를 마치고 86년 늦가을 서울을 떠날 무렵 찰리는 모든 이임 행사에 참석, 우리 부부에게 찬사를 보냈다. 86년 10월23일자 코리아 타임스에는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우리를 위해 마련한 만찬 사진이 실렸다. 그 사진은 그와 내가 농담하는 모습에 초점이 맞춰졌다. 86년 11월4일 그는 내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한국과 관련한 나의 가장 소중한 추억중 하나가 됐다. 이 편지는 내게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전문을 소개한다.

『딕시에게, 당신의 우정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곁을 스치고 이내 사라지는 사람도 있는 반면,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이도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곁에 머물 사람중 한명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와 지도력 덕분에 한미 양국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양국은 당신이 구축한 토대를 바탕으로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당신과 세니가 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나를 방문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중건 대한항공 사장 올림』

서울의 대사 임기를 마무리하는 내게 그 얼마나 가슴 따뜻한 사연인가. 이런 우정은 정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보물이다. 그는 앞으로도 한미 관계 발전에 보탬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이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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