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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추억/김병주 서강대 교수·경제학(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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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의 추억/김병주 서강대 교수·경제학(화요세평)

입력
1998.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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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 궁전밑엔 헐벗고 굶주리는 주민들 우리민생도 다급한데 정치권 힘겨루기만…” 수도 부쿠레슈티 도심의 한 호텔에 투숙한 나그네는 떠돌이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에 며칠 밤잠을 설치곤 했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을 지원받기 불과 얼마전인 지난해 11월 중순 우리의 경제개발경험 전수팀 파견을 위해 사전답사차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길거리에 떠돌이 개들이 늘어난 것은 차우셰스쿠가 도심 일각의 주거지를 철거할 때 주민들이 버린 개들 때문이다. 차우셰스쿠도 한때 국민에 인기있는 대통령이었다. 그러던 그가 평양에 다녀오고 나서 사람이 달라졌다. 김일성 정권으로부터 감화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북한의 주석궁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도 대규모 건설사업을 벌였다. 집을 많이 허물고 평지를 구릉지로 바꾸어 언덕바지에 대통령궁을 세웠다. 본인은 살아보지도 못하고 처형되고 말았지만 총건평이 무려 33만㎡, 단일 건물로는 미국 펜타곤 다음으로 큰 세계적 건물이다. 지금은 「국민궁전」등으로 불리는 이 건물은 유명 관광코스로 변해 약간의 외화벌이에 도움이 되겠지만 엄청난 대리석, 카펫, 샹들리에등 자재 및 인력의 투입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비용 편익분석을 무시하는 사회주의체제라지만, 죽음을 겁내 저격수의 사거리밖 언덕위에 원형으로 배치한 대형건물들을 보면 현대판 피라미드 위에 선 느낌이다.

 평양 여행길에서 가져온 또하나의 선물은 주체사상 방식의 국민경제 운용이었다. 외세의 영향을 단절하기 위해 강압적 외채축소운동을 전개해 민생을 도탄으로 몰아넣었다. 민생의 애로는 혁명불길에 건초더미였다. 김일성은 외채 떼어먹기로 제 수명을 다하고, 그는 외채결벽증으로 횡사했다. 결과는 두 나라 모두 세계 최빈국이다. 루마니아는 97년 일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600달러였다.

 한반도 전체보다 넓은 국토, 남한 인구 절반 정도의 인구, 전국토의 64%가 농경지, 온화한 기후, 좋은 부존조건을 가지고도 동구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경제권에 묶여 중화학공업에 치중했던 결과 오늘날에도 대부분 농산물은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로 전락했다. 식량난과 연료난으로 고생하는 민초들의 시가지 위에 우뚝선 차우셰스쿠 궁전은 묘한 대위법을 이루어 여행자 뇌리에 남는다.

 루마니아는 한나라 지도자가 어떤 경제체제를 선택하느냐, 어떤 정책노선을 따르느냐가 국민생활의 양과 질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가를 깨닫게 한다.

 광복이후 우리는 얼마나 숨가쁜 역사를 살아왔던가. 남한만이라도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해 온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최근 정치지도력의 혼미로 나라경제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훼손되었다. 깊이 천착한 철학과 일관된 정책지침없이 반짝하는 아이디어들에 국정의 방향타를 맡기고 각계의 집단이기주의를 자제하지 못해 한국도 IMF지원금융 수혜국으로 전락했다.

 실업률이 작년 10월 2.1%에서 올해 1월 4.5%로 높아져 실업가구가 93만명을 넘어섰다. 올해 실업인구가 200만명을 육박하고 실업률이 10%를 웃돌 가능성도 각오해야 할 모양이다. 이 경우 국민생활의 안정과 사회질서에 상당한 위협이 가해질 것이다. 퇴직금 및 저축, 그리고 사회보장제도가 실업자의 생계를 지탱할 것인가, 앞으로 예상되는 각종 시위와 범죄발생에 대비한 사회의 결속력은 믿을만한 수준인가를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새정부가 출범하고도 국무총리 인준문제로 행정공백이 지속되었다. 여야는 모두 입장을 합리화하는 제나름의 논거가 있을 것이지만 시급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민생문제가 산적해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정부조직개편으로 행정이 표류하고 있다.

 루마니아 방문시 정부조직 개편이 임박해 관리들이 바로 다음주에 자기 부처의 운명을 모르고 있는 상황을 보고 방문팀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아마도 요즈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1월중 제조업 생산시설 가동률이 68.3%에 불과하고 산업생산은 10.3%의 감소율을 보였다. 국내 도소매업은 71년 통계작성이래 최저인 9.7%의 감소율을 기록했다. 이제 본격적인 고통이 시작되고 있다. 가계 노동자 기업인과 함께 고통을 분담한다는 차원에서 정치권의 힘겨루기게임이 일찍 마감되어야 겠다. 요즘 부쿠레슈티의 밤거리는 조용한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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