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하게 대통령 취임식을 끝내셨습니다. 당선이 확정되던 작년 12월19일부터 취임식이 있었던 지난 2월25일까지 68일시간으로 하자면 장장 1,632시간, 이 나라의 국가원수는 누구였습니까. 김영삼 대통령은 그 기간동안 크고 작은 나라일을 몽땅 당선자에게 떠맡기시고 전혀 돌보지를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이미 취임식이 있기 68일 전부터 대통령에 취임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게 느꼈습니다. 그 기간동안 국가적 대란이 전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은행통장의 100만원이 불과 며칠 사이에 실질적으로 50만원으로 줄어들고, 실업자의 수가 100만명을 넘어서는데, 격분한 군중이 청와대로 쳐들어가는 일도 족히 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쿠데타의 경력이 전혀 없지도 않은 이 나라의 군대가 조용히 앉아 군부의 전성기를 창출했던 선배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으리라고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2의 박정희, 제2의 전두환이 100만 대군에서 완전히 뿌리가 뽑혔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중의 폭동이나 군부의 동요보다 더 걱정스러웠던 것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었습니다. 권력의 실질적 공백이라고도 여겨졌던 그 68일중 어느 하루, 미친 척하고 휴전선 어디에서라도 6·25의 재판을 시도했다면 국군의 통수권은 누구 손에 있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까.
취임식까지가 아슬아슬했다는 표현은 15대 대통령의 자질이나 자격을 문제삼아서가 아니라, 헌법상의 대통령과 실질적인 대통령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그 두달 남짓한 세월, 혹시 돌발적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취임식이 그토록 성대하게 그리고 그토록 의미심장하게 치러진 사실에 경의를 표하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 축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산 넘어 산이다」는 격언을 평생에 처음 써보는 바는 아니지만,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 어쩌다 이런 험한 산에 부딪치게 되었습니까. 이 불행이야말로 「산 넘어 산」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통화위기도 차차 진정 기미가 보이고 주식시세도 지수가 600선을 향해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고 보이는데, 새로 야당이 된 한나라당이 총리인준을 거부하고 나서 당장 국정을 마비시키고 있으니, 정치판은 조금도 개선된 바가 없다고 잘라서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김종필씨의 총리 임명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의 당연한 수순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건, 김대중 후보가 김종필씨를 총리로 한다는 확약이 없었다면 충청도표가 그렇게 많이 김대중 후보에게로 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 표가 없었다면 김대중 후보가 과연 당선이 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는 것은 김대중 정부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새로 국민 앞에 선을 보이는 야당이 국회출석을 거부하여 국민을 실망시키고 법과 상식을 벗어난 「백지투표」같은 것으로 국정을 계속 어지럽게 만든다면 3개월 뒤에 실시될 예정인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승리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야당에서 나왔으므로 여당이 야당이 되었으니, 관례로 보아 여당이다가 야당이 된 사람들이 다음 선거에는 유리할 것이 뻔한데 어찌하여 국민의 심리를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좋은 기회를 발로 차는 것일까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무기명 비밀투표는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임명동의안이 가결될 만큼 표가 확보되기 전에는 아무리 국정이 표류하더라도 대통령께서는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처음부터 흔들리시면 내내 흔들리십니다. 대통령께서 정치 9단의 실력을 발휘하실 때가 바로 이 때라고 짐작됩니다. 국정이 표류하면 대통령만 힘드신게 아니라 국민도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리고 여소야대의 국회도 국민의 일부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동지였던 옛 정을 되새기며, 영광의 날들이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김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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