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희망을 찾는 수 많은 눈동자/하지만 네번째 싸움서도 기회는 물거품/70대 후반에 다시 5수를… 아아…”/그때 “일어나시죠.취임식 가셔야죠” 취임식을 하루 앞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지금 어떤 심경일까. 미증유의 국난을 헤쳐가느라 때로는 밤을 지새우며 노심초사하고 있지만 4수끝에 성취한 당선의 기쁨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래서 꿈인지 생시인지 다리를 꼬집어 보고 있다는 유머가 떠돌았으리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인 라종일 경희대 교수가 이런 심경을 대신 그린 콩트 「DJ의 꿈」을 한국일보에 보내왔다. 내용을 들은 김당선자도 이 즐거운 유머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자신의 심경을 정확히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편집자주>편집자주>
온통 회색빛의 혼돈이었다. 이 미로로부터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점차로 이것 저것이 제자리를 잡고 그러면 혹시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하늘은 나에게 끊임없는 시련과 좌절 만을 안겨주는가. 그와 함께 뒤로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내, 그리고 쉬지 않고 일만 해야 하는 체력을 함께 마련해 준 것인가.
이중 어느 하나 만이라도 덜 갖추고 태어났던들 나의 인생은 훨씬 편하고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여러차례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대하는 극한의 경험을 했다. 사내답게 죽음 앞에 맞서기는 오히려 덜 어려운 일이었다. 죽음에서 놓여나서 다시 삶을 대하는 충격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보다도 주변의 기대는 더 무거운 짐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차라리 적을 상대하여 승패를 가리는 일은 얼마나 마음 가벼운 일인가. 나를 쳐다보고 나에게서 유일한 희망을 찾는 수 많은 눈동자야말로 나로 하여금 한시의 휴식도 즐길 수 없게 하는 질긴 멍에이다. 마지막의 실패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실의와 아쉬움을 안겨주었겠는가? 이들의 앞에 서서 벌써 네차례 싸움터에 나가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
어느때 한번이라도 이 싸움에서 공정한 대접을 기대한 일도 받은 일도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의 경우는 좀 나은 편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언론의 여당편들기나, 관권의 동원도, 그리고 예외없이 불어대는 북풍도 그대로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그 정도는 예전보다 훨씬 덜 한 셈이었고 국민들의 반응도 민감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유례없는 실정으로 기성 권력층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었다. 추진하던 연립전선도 제대로 성취되었다.
진정 나에게도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한번만 기회가 주어졌었다면…. 아아 생각만해도 가슴이 뛴다. 수십년동안 꼭같은 사람들의 집권으로 고여서 썩은 물을 말끔히 갈아내고 사회의 도처에 맑고 신선한 물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할 수 있었다.
갈등으로 얼룩진 이 땅에 화합의 순풍이 불도록 할 수 있었다. 권위주의로 멍든 경제를 다시 활기차고 풍요롭게 하였을 것이다. 남·북이건, 동·서이건 간에 막힌 장벽들을 헐고 대화와 교류의 공간을 넓혀갔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아니 한세기에 걸쳐 비꼬인 역사의 흐름에 새로운 물꼬를 틀 수도 있었다. 그뿐인가, 세계무대에서 동북아시아는 제대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중국으로, 시베리아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한없이 뻗는 시선, 수많은 알찬 기획들….
이제 이 구상들을 모두 묻어두고 다시 5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70대 후반에 다시 한번 전쟁에 나서야 한다. 5수를 해야 한다니…. 아아, 부지불식간에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그때에 『그만 일어나시지요. 취임식에 가실 준비를 하셔야지요』 집사람이 가볍게 흔든다. 새 봄을 앞둔 꿈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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