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기능을 정상화해야 한다. 은행이 재벌의 전횡과 오류를 시정하는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 도이체방크 코멀츠방크 등 독일 민간은행장은 경제 분야의 여론을 좌우하는 논객들이다. 이들은 금융·통화정책 등 관련 분야뿐 아니라 거시경제 운용, 실업대책 등 거의 전분야에 걸쳐 언론 기고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AEG 폴크스바겐 등 개별 기업의 투자계획에 관한 산업정책에도 거침없이 견해를 밝힌다. 독일은 기업 지분을 가진 은행이 경영에 공식 개입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여서 우리나라와는 경제체계상 큰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수천억원 이상 은행돈이 들어가는 반도체 자동차 유화 등 대규모 장치산업의 투자결정 과정에서 시중은행장들이 적정성 여부를 따지는 의견을 공식화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일부 언론기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부분 겉핥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은행장들의 이같은 침묵이 해묵은 관치금융의 후유증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17일 『대기업들은 3∼4개, 많게는 5∼6개 핵심기업을 빼고 나머지는 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0대 재벌로 부터 자체적인 구조조정안을 제출받은 뒤 처음 꺼낸 얘기다. 김당선자는 은행이 대기업의 구조조정을 융자의 조건으로 삼을 것이므로 수용치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금융의 산업정책적 기능에 관한 언급이어서 향후 재벌정책 방향에 대해 시사하는 바 크다.
각 시중은행은 이날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약정」을 확정, 주거래은행별로 53개 그룹(은행여신 2,500억원 이상)에 약정서를 발송했다. 계열사 구조조정, 부채비율 감축, 차입금상환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협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은행의 심사기능을 통해 재벌의 방만한 경영에 제동을 걸겠다는 취지다.
이번 기회에 은행장들은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뱅커의 신중함을 충분히 발휘해 줄 것을 기대한다. 차제에 재벌 협조융자, 일률적인 중소기업 대출 연장 등 새 정부의 응급조치에 대해서도 금융논리상 예상되는 부작용과 파장을 당당히 제시하고 대비케하는 용기를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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