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 건설」이라는 구호와 함께 5년전 무대에 올라섰던 김영삼대통령정부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있다. 이제 「신한국」은 온데 간데 없고, 우리는 1,500억달러가 넘는 빚더미를 짊어진채 구제금융을 주는 사람들에게 허리굽혀 『고맙습니다』를 말하는 입장에 서있다. 「자칭 선진국」의 참담한 몰락이다. 이 국가적 부도사태는 김대통령이 취임한 뒤 4년반동안 끊임없이 노래해온 정치적 구호끝에 날벼락처럼 떨어졌다.
김대통령시대 5년은 사상 유례없는 「구호정치」의 시대였다. 첫 구호는 93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지도자회의에 다녀온 뒤 내놓은 「국제화」였다.
이때 김대통령은 『대통령자리를 걸고 막겠다』던 「쌀시장 개방」의 덤터기를 쓰고 왔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들은 덤터기는 말하지 않고 「국제화」만 노래했다.
「국제화」는 이어서 「경쟁력」으로 바뀌고, 다시 「세계화」가 됐다.
「구호정치」는 입이 있어야 하고, 확성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김대통령의 입과 확성기는 신문과 방송이었다. 이들 언론매체는 날이면 날마다 거대한 합창단처럼 「경쟁력」과 「세계화」를 노래했다. 합창단의 지휘자는 김대통령이었다.
합창곡중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도 있었다. 애초에 김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의 심판을 「역사에 미루기」로 했다가 국민적 항의에 부딪혀 「역사 바로 세우기」로 방향전환을 했다. 신문 방송들은 자동적으로 「역사에 미루기」를 「역사 바로 세우기」로 레퍼터리 바꿔치기를 했다.
지휘자 김대통령과 합창단원 언론매체들이 굴욕적 참패를 당한 일도 있다. 94년 6월의 지방선거때였다.
이때 정부·여당은 『지방자치의 정치화는 안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소속에 표를 찍자』는 전술로 나왔다. 신문 방송들은 옷을 벗어붙이고 정부·여당편에 섰다.
언론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권력편에 선 것은 50년 선거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선거는 정부·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것은 바로 언론의 참패였다. 언론이 이처럼 무참하게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언론은 오히려 「세계화」나 「경쟁력」의 합창에 분주했다. 국민의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보도에서 기획기사와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신문·방송들은 날이면 날마다 경쟁력의 이름밑에 업계뉴스 업계 홍보물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언론은 만인을 「돈」의 신도로 만드는 천박한 신흥종교의 전도사가 됐다.
게다가 언론은 금리가 높고, 노임이 높고, 땅값이 높아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3고」를 난타했다. 그것은 바로 재벌의 소리였다.
문제는 고금리가 아니라 「빚더미 문어발」이요, 땅값 폭발로 돈을 갈퀴질한 것은 대기업집단이자 그 오너들이요, 노임을 앞장서 올린 것은 독과점의 노다지위에 올라 앉은 대기업집단이라는 사실에 대해 언론은 눈을 감았다.
그래서 이 나라는 「비판과 견제」가 없는 「태평성대」천하가 됐다.
김대통령시대는 「유착」을 넘어선 「일체화」의 시대였다. 언론이 권력과 한 통속이 된 「권언 일체화」, 재벌과 한 몸이 된 「경언 일체화」의 시대다.
우리는 지금 그 「일체화」의 값을 치르고 있다. 권력과 한 몸이 된 언론이 「경쟁력」합창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이 나라의 경쟁력은 땅에 떨어져 결국 거덜이 나고 말았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아이러니다.
그것은 언론이 「비판과 견제」라는 기본적 직무를 1만분의 1이라도 수행했던들 일어날 수 없었을 파탄이요 치욕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앞에 두고 있다. 언론매체들, 특히 방송과 달리 권력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는 신문등이 폭력적 언론통제가 없는 소위 「문민시대」에 왜 권력의 충실한 입이요 확성기 노릇을 해왔는가.
이 나라의 언론은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5공정권이 몰락하고 마지막 군사정권인 노태우정권이 물러가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반성이나 과거청산없이 치외법권지대에서 발장구치며 즐겨왔다.
그러나 나라가 파산지경에까지 이른 이제 언론은 스스로 채찍을 들어 자기자신을 매질하고 참회하는 양심과 용기를 국민앞에 보여줘야 한다. 5공정권이래 누적되어온 「전천후 해바라기」의 유산을 청산하고 김영삼정부의 참담한 실패의 공동피고로서 자신을 비판하고 징벌해야 한다.
그래서 오직 사실과 진실과 양심에 따라 글을 쓰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고귀한 사명을 다하기로 다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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