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삼키는 블랙홀” 종금사는 주범인가 아니면 희생양인가/무모한 외화차입 동남아서 이자놀이/달러 막히자 ‘원화확보전’ 고금리 부추겨/부총리도 “재경원과 한패” 한탄 감독사각/11월 자본비율 등 대책마련땐 “이미 중증”/외채 170억불 “은행비해 훨씬 적다” 반론/‘더큰 실정 가리기’ 음모논 제기도 『A종금사 (폐쇄에 대해) 이의 없습니까?』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신용관리기금 회의실. 11명의 종합금융사 경영정상화계획 평가위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종금 살생부」를 한장 한장 넘겨 갔다. 생사의 경계에 서 있던 한 종금사 임원들이 최후의 구명운동을 위해 찾아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회의는 점심도 거른채 6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S, H 등 의견일치가 이뤄지지 않은 종금사에 대해서는 무기명투표가 실시됐다. 「외환위기의 주범」 「자금시장의 블랙홀」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된 종금사들. 이 가운데 10개 종금사에 사형이 언도되는 순간이었다.
▷황금시절◁
시중은행 국제금융부 직원 이모씨. 후발 종금사들이 외환업무에 뛰어든 96년말 이후 거의 매일 외국 거래은행과 실갱이를 벌여야 했다. 『당시 3개월 빌리는 금리가 연 5.8% 정도였는데 홍콩 싱가포르 시장에서 외국은행들이 6%이상을 요구했다. 한국의 은행들이 그만한 금리로 빌려갔다는 거였다. 아무리 「Merchant Bank(종금사)」와 「Bank」는 다르다고 설명해도 먹히질 않았다』 지방 S종금사 국제금융부 직원의 말. 『이자마진이 1%만 넘어도 이익인데 외환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같은 곳에 투자하면 3%가 남았다』 또다른 지방 H종금사 직원의 증언. 『국내 단기금융은 이자마진이 0.05%도 나기 힘든 상태였다. 당시에는 회사 수익의 절반이상을 외환업무에서 냈고 「인도네시아 못가면 병신」이라는 말이 상식처럼 통했다』
재정경제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장기차입과 달리 제재가 없고 금리도 낮은 단기자금이 투자재원이 됐다. 종금사들이 동남아 러시아 등 이른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위험이 큰 만큼 이익도 많다)」지역에 빌려준 돈은 지난해 3월 현재 48억6,000만달러. 뒤늦게 외환시장에 뛰어든 겁없는 후발종금사들이 30억8,000만달러를 차지했다.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입 안의 열매는 내뱉기엔 너무 달콤했다.
▷파국◁
일은 터졌다. 지난해 7월2일.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동남아 금융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2주일후인 7월15일. 기아그룹에 대해 부도유예협약이 적용됐다. 동남아에 달러를 집중투자하고, 국내 대기업들에 거액의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의 해외신인도가 급락했다. 종금사들의 어려움은 더 커졌다. 새로 돈을 빌릴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빌려쓰고 있는 돈의 만기연장도 힘들어졌다. 외국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종금사들에 다시 내주던 은행들도 외화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종금사에 나간 돈을 일제히 회수하기 시작했다.
8월18일. 근근이 버티던 종금사들이 손을 들었다. 7개 종금사들이 당일 결제외화자금을 못막고 한국은행에 SOS를 타전했다. 한은은 국내은행을 통해 총 4억달러를 긴급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종금사 외환부도가 현실화했다. 한은 국제부 관계자 증언. 『문제가 발생했지만 당시로서는 일시적인 문제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종금사들은 회생불능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10월22일 기아그룹 법정관리 발표와 23일 세계증시 동반폭락은 9월을 간신히 넘긴 종금사들에 치명상을 입혔다. 종금사는 해외나 국내은행에서 달러를 빌리는 길이 막혔다. 달려갈 곳은 국내 외환시장밖에 없었다. 외환은행 국제금융부 딜러의 회고. 『종금사들이 원화를 팔아 달러를 사들이면서 환율은 걷잡을 수 없이 올랐다. 또 이들이 달러구입용 원화를 확보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자금을 조달하다 보니 금리도 급격히 치솟았다』 이때부터 종금사들에 「블랙홀」이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달러와 원화를 마구 잡아먹는다는 의미였다.
▷실기와 실책◁
그렇다면 감독당국인 재경원과 은행감독원은 무엇을 했을까. 종금사등 제2금융권은 철저히 재경원 관할이다. 「자기자식」인 종금사에 대한 재경원의 철저한 감독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다. 재경원 A국장 회고. 『강경식 전 부총리는 「한은은 은행하고, 재경원 금융정책실은 제2금융권하고 한패거리가 돼 있더라」며 한탄하곤 했다』 무슨 뜻일까. 일차 폐쇄대상에 포함된 쌍용 항도 경일 신세계종금이 지난해 재경원이 실시한 경영평가에서 A등급을 받았다. 단기금융과 외환업무 검사업무를 위임받은 은행감독원 역시 「남의 자식」에게 함부로 군밤을 먹일 처지가 아니었다. 종금업계 관계자의 증언. 『규정에는 외화차입 가운데 장기차입비중이 50%를 넘도록 되어 있다. 단기비중이 50%를 넘을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방종금 가운데 장기차입 비중이 가장 높은 축에 끼는 S종금도 장기조달 비중이 48%를 넘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규정위반으로 지적당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나마 빌려온 돈을 어디 쓰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규정도 없었다. 수익률이 높은 장기대출이나 투기적 상품으로 돈이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
경고음은 수차례 울렸다. 한 금융통화운영위원의 회고. 『4월쯤 금통위 회의에서 종금사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어떻게 이 모양이냐」는 말들이 오갔지만 제재 권한은 재경원이 갖고 있어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재경원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종갑 자금시장과장의 증언. 『종금사들의 외화나 원화 운영규모가 너무 커져 등급을 평가, 업무개선명령 등 조치를 내리려는 계획을 1월부터 마련했다』 재경원은 7월초에야 각 종금사에 「종합금융회사 자기자본 관리제도」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하지만 이는 「증권사 자기자본관리제도」에서 「증권」대신 「종금」을 집어넣은 것에 불과했다. 7개월이나 걸려 준비한 역작치고는 부실작품이었다. 그나마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자 슬그머니 후퇴했다. 다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에 따른 평가기준을 마련한 것은 11월5일.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의 회고. 『7월부터 10월까지는 기업연쇄부도를 막기 위해 종금사를 독려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기 힘들었다』 『차입과 운용의 장단기 불일치(미스 매치) 문제도 10월이전에 제기됐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10월이후 일부 종금사들은 이미 폐쇄 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2월2일 새벽. 임창렬 경제부총리와 휴버트 나이스단장을 대표로 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실무협상단 간에 심야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IMF의 요구는 강경했다. 종금사 12개를 폐쇄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새벽 3시가 넘어 임부총리는 9개 종금사에 대한 영업정지명령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금시장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일주일후(10일) 추가로 5개사의 영업을 정지시켜야 했다. 실기와 실책의 연속이었다. 종금업계 관계자증언. 『부실덩치가 훨씬 큰 종금사들이 1차에 포함되지 않아 잡음이 일었고 금융시장도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됐다』
▷종금은 희생양?◁
그렇다면 외환위기의 주범은 종금사인가. 종금협회 경제연구소 오용석 박사의 항변. 『종금을 주범으로 모는 것은 외환관리정책 및 전체 금융권에 대한 감독실패, 나아가 국가신인도 저하를 불러온 더 큰 실정을 가리는 음모다』 30개사 직원을 다 합쳐봐야 1개 시중은행만도 못한 3,000명에 불과한 종금업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피해의식이 종금권에는 짙게 깔려 있다.
종금사의 방만한 경영이 위기의 도화선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1,500억달러가 넘는 총외채(대외지불부담) 가운데 겨우 170억달러를 차지하고 있는 종금사들이 전적으로 책임을 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 종금사 사장의 지적. 『외환보유고의 절반이상을 은행 해외지점 등에 묶어두고 환율방어에 그나마 있는 돈을 쏟아 부은 외환당국자들, 금융기관 외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은행들의 책임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이 점은 재경원도 동의한다.
종금사 감독업무의 실무책임자인 이종갑 과장도 「종금사는 피해자」라고 인정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왜 「피해자」만 문을 닫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종금사 탄생서 위기까지/72년 사채양성화명목 투자금융사설립/이·장사건후 양산 한때 “황금알 거위”/94·96년 세계화 명분 종금사로 전환
투자금융사들의 탄생과 소멸은 우리 금융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위기를 겪고 있는 종금사들 대부분은 단자회사라고도 불렸던 투자금융사에서 바뀐 「전환종금」이다. 반면 「선발종금」은 73∼74년 1차 석유파동 이후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은행들과 합작으로 설립된 회사다. 한국 한불 한외 현대 새한 아세아 등 6개사다.
투금사의 모태는 사채시장. 72년 「8·3조치」로 사채동결조치가 내려졌다. 대기업들조차 사채시장에서 어음을 할인, 단기자금을 끌어다 쓰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다. 어음할인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비대한 사채시장을 양성화한다는 명목으로 투금사들이 설립됐다. 한국(현재 하나은행) 한양(보람은행) 대한 동양 서울(일은증권) 제일 중앙 등이 이때 태어났다. 근대화 과정에서 투금사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투금사들이 또한번 무더기로 생겨난 것은 80∼83년. 특히 82년 「이장」어음사기사건이 일어난뒤 다시 한번 사채양성화 명목으로 12개 투금사가 탄생했다. 로비설과 특혜설이 무성했지만 군사정권시대라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당시 재무장관은 강경식 전 부총리. 그는 97년 부총리로서 자신이 허가해 준 투금사들의 부실화과정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가 뿌린 씨앗이 자라나 그의 목을 졸랐다. 묘한 인연인 셈이다.
투금사들은 만성적인 자금수요 초과와 이에 따른 고금리 혜택을 누리면서 급성장했다. 기업어음(CP)할인업무를 통해 은행권이 감당못하는 단기금융 지원역할을 수행하고 신용대출 관행을 확산시키는데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금리가 안정되고 자금사정이 개선되면서 투금사들의 이익은 급격히 줄었다. 6공때인 92년, 외화 리스 투신업무까지 할 수 있는 종금사로의 전환이 추진됐지만 대선을 앞둔 정치자금 조성용 특혜라는 의혹만 사고 무산됐다. 하지만 94년과 96년 두차례에 걸쳐 금융기관의 세계화·대형화라는 명분과 맞물려 투금사들은 모두 종금사로 전환됐다. 외환위기의 씨앗이 뿌려졌다.
□특별취재반
이상호 경제부 차장대우
정희경 경제부 기자
이성철 경제부 기자
김준형 경제부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