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식 김인호 이경식의 “잘못된 선택”/불난집서 ‘화재예방’ 타령/강경식/한은법·금융통합 주력/환란태풍 대비책소홀/일 만들기보다 수습했어야/김인호/‘원칙주의·반재벌론자’ 수식어/강 부총리와 경제관 비슷/조정·브레이크기능 부족/이경식/외모 신경안쓴 ‘파격’ 총재/“총외채 2,600억불” 불쑥발언/모라토리엄 가능성 확산 『경제정책 홍보활동을 강화하라. 9일부터 30개 지방도시를 돌며 약 1개월간 경제특별강연을 하겠다. 「21세기 국가과제」라는 제목의 홍보영화(부총리 출연·7분짜리)를 제작, 전국 개봉관에서 문화영화 형태로 상영토록 하라』(97년 10월4일, 강경식 부총리)
『(장관급으로 격상된 만큼) 법에 주어진 모든 권한을 가능한한 활용할 생각이다』(96년 3월8일 취임식, 김인호 경제수석·당시 공정위위원장)
『(대통령에게 「노(No)」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노」라고 말한 적은 없고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93년 9월16일 관훈클럽토론회, 이경식 한은총재·당시 부총리)
경제부총리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 한국은행총재. 우리 경제를 움직이는 「빅(Big) 3」다. 김영삼 대통령은 『외환위기는 전적으로 내 책임』(2월4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언급의 배경에는 빅 3의 책임회피적 행태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강하다. 우리 경제를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지원으로 몰고간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강경식김인호이경식 팀이 보여준 외환위기 대처는 잘못된 선택이었나.
강경식 부총리. 『강부총리는 「나는 잘하고 있는데 언론과 국민들이 잘 몰라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재경원간부의 회고 처럼 그는 지난해 10월초 홍보강화를 지시한다. 한보 기아 등 대기업 연속부도와 금융시스템 마비 등으로 경제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경제를 책임진 부총리가 경제를 총체적인 위기상황으로 만들어 놓고 외부강연이나 다니는 등 강 건너 불 구경식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97년 10월17일 국정감사에서, 야당의원) 그래도 강부총리는 강경했다. 「강경식」이었다.
『경제는 사람이 결정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된다고 믿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 경제고, 안된다고 좌절해 버리면 정말 안되는 게 경제이기도 하다』(82년 6월, 강부총리 재무부장관 취임때) 장영자·이철희 사건으로 경제가 무척 어려울 때였다.
15년후인 지난해 3월. 정부과천청사 1동 지하강당에서 열린 강부총리 취임식. 『우리 경제가 굉장히 어렵다.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잠재력은 엄청나다』 『임기말이라고 하지만 정권에는 임기가 있으나 경제에는 없다』고 특히 강조했다.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역전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항상 「선발투수」였다.
직구와 변화구를 적절히 배합, 잘 던지고 있는데 관중은 모르고 있다는 식이었다. 97년 9월11일 하오 재경원 지하대강당. 21세기 국가과제 직원 설명회. 강부총리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경제정책이 술에 물탄 듯 화끈하지 않다고 한다. 경제가 어려우니까 시장경제원리를 집어 치우라는 소리도 들린다. 이거야말로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곳 저곳에 가서 설명해야 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어깨를 펴고 대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 달라』 연이어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IMF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던 지난해 12월 초순. 그는 각계인사에게 퇴임인사장을 보냈다. 『우리 경제의 새로운 틀을 짜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하고 특히 금융개혁법이 무산됨에 따라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됐다』
환란태풍 대비에 온 힘을 쏟아야 할 때 이를 방해한 것 중의 하나가 한은법 개정과 금융감독기관 통합법안. 이 부분은 전임 경제팀이 차기 정권 과제로 넘겼던 것이다. 왜 강부총리는 이를 뒤집었을까. 『왜 정권말기에 서둘러 추진하느냐는 지적이 있으나 내년말이면 사실상 금융시장이 개방되는 만큼 늦출 수는 없는 과제다』(97년 9월11일 직원설명회, 강부총리)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일을 벌이기는 잘하나 마무리는 미흡하다」 강부총리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대기업 부도가 이어지고, 금융시장이 큰 동요를 보이고 있는데도 「구조조정」이 중요하다며 「21세기 국가과제」를 만들어 전도사처럼 각 지역을 순회했다. 15년전에도 똑같았다. 82년 1월 경제기획원차관보에서 재무부차관으로 옮긴후 일상업무 처리보다는 직원들을 상대로 자신의 경제철학과 주장을 펴는데 더 열을 올렸다.
경제부처장관을 지낸 한 인사의 평가. 『강경식 부총리는 왜 자기가 한보사태 이후 경제팀장이 되었는지에 오류를 범한 것 같다. 정권말기 그것도 한보사건이라는 미증유의 경제대형사건이 터진 마당에 당연히 경제팀장은 만들기보다 수습해야 되는 게 순서다. 다음 정권에 부담없는 경제를 물려주는 게 정권말기 경제팀의 역할이다. 그의 성격 탓일 것이다. 결국 인사권자의 안목이 중요하다』
김인호 경제수석. 「경쟁이 꽃피는 사회」 「시장으로의 귀환」 김수석이 아끼는 액자 내용이다. 앞의 것은 공정거래위원장 집무실, 후자는 청와대경제수석실에 걸려 있었다. 국가부도라는 눈 앞의 불을 끄기 보다는 화재방지방안 마련에 더 힘을 쏟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시사하는 내용들이다.
「원칙주의자」 「반재벌론자」 김수석을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89년 기획원차관보 시절. 조순 부총리와 한승수 상공부장관이 한국중공업 민영화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때 기획원안(민영화)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부총리가 사표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 실제로 부총리가 국무총리에게 사표를 내기도 했다.
96년 5월 공정거래위원장 시절. 대기업 채무보증 폐지방침을 발표했다. 재경원이 발칵 뒤집히면서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참다못한 나웅배 부총리가 한마디 했다. 『의욕이 너무 앞서는 부처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경제수석으로 임명된 후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석비서관은 얼굴없는 자리다. 내각이 일할 수 있도록 중간역할을 충실히 하겠다』(97년 2월28일, 취임직후)
이른바 KK라인을 형성하고 한보사태이후 경제정책을 주물렀던 강부총리와 김수석은 같은 기획원출신 엘리트로 경제철학이 비슷했다. 하지만 결과는 IMF행이었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임기말이어서 대통령의 제어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강부총리의 이상론이 기본적인 검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정책으로 나타난 데도 한 이유가 있다.
재경원 A국장의 증언. 『김수석은 부총리와 의견차이가 있을 경우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지만 대부분 부총리의 결정을 따랐다』 청와대 참모로서의 조정역할, 브레이크 기능이 부족했다는 이야기다.
이경식 한은총재. 그는 스스로 막걸리타입이라 할 만큼 모양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 성격은 「고매한 품위와 덕망」을 강조하는 한은총재의 전통적인 외양에 하나의 파격이었다. 현 정부 초대 부총리 시절인 93년 6월21일. 기획원 상공 노동 3부 장관 합동기자회견. 「무노동 무임금」문제를 놓고 벌어진 부처간 불협화음을 막으려던 참이었다.『경제장관회의에서 다른 장관들에게 「여보시오」라며 큰소리치는 것이 부총리가 아니다. 나는 경제가 잘되면 어떤 장관에게도 엎드려 절을 할 용의도 있다』
그의 스타일을 그대로 보여줬다. 박재윤 경제수석의 독주를 따라가기에 급급해 『심심했을 것』이라는 말이 「주사급 부총리」와 함께 나돌았다. 3공때 두차례(74, 79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같은 그의 성격과 기질이 외환위기의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11월21일 김영삼 대통령주재의 민관합동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그는 이날 기업외채를 포함한 총외채가 얼마나 되느냐는 참석자의 질문에 약 2,600억달러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중앙은행 총재가 내뱉은 말은 곧 외신을 타고 전세계로 타전됐다. 메릴린치 등 외국 금융기관에선 『중앙은행총재가 2,600억 달러라고 말했다면 적어도 3,000억달러는 넘는다』는 반응과 함께 급속히 한국의 모라토리엄(대외지급유예) 가능성이 확산됐다.
IMF로 가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빅 3뿐이다. 이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1월16일 모여 적당한 시기가 되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기로 합의했다.
◎IMF행 왜 막판까지 부인했나/“경제기초여건 탄탄” 지나치게 집착/“전략상 불가피” “예측불능” 주장도
강경식 부총리는 막판까지 국제통화기금(IMF)행을 부인했다. 「어쩔 수 없는 전략」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눈 가리고 아옹식」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일부 전문가들은 『IMF 긴급자금 지원 요청은 회원국의 권리다. 지원 요청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고 반박하고 있다. 강부총리는 세상이 온통 외환위기론으로 떠들썩하던 11월에도 『외환위기는 없다』는 강변을 되풀이했다. 「경제 펀더멘털(기초여건)론」이 그 근거였다. 이 점은 그가 온 힘을 쏟았던 「열린 시장경제로 가기 위한 국가과제」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원화의) 어느 정도 평가절하는 불가피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남아 국가와 같은 위기상황은 아니라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첫째, 우리의 기초경제여건은 태국 등 동남아 국가보다 훨씬 건실하다. 둘째, 우리 환율제도는 기초경제여건과 유리되어 달러에 고정된 환율을 유지하려고 했던 태국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셋째, 우리 자본자유화는 아직 진행중이기 때문에 외국의 투기자금이 자유롭게 넘나들 여지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김인호 수석. 『IMF행이 늦었다고 비난하지만 타이밍상에 문제는 없었다. 시간이 있었다면 더 검토했을 것이다. 외환위기는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다. 이처럼 전면적인 채무상환연장 불가가 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금융개혁법안을 이미 다 만들어 놨기 때문에 IMF가 쉽게 일할 수 있었다』(1월15일, 개인사무실에서)
이경식 총재. 『10월들어 외국인들이 증시에서 주식을 많이 판다고 하지만 실제로 빠져나간 규모는 3억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 외환시장에서 하루에 거래되는 달러량이 평균 15억달러에 이르고 한은의 외환보유고가 300억달러에 달하므로 외환위기가 초래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97년 10월26일, 한 신문과의 인터뷰)
□특별취재반
이상호 경제부 차장대우
정희경 경제부 차장
이성철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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