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태풍 덮쳐올때…/재경원한은 밥그릇싸움/기획원재무부출신 알력/10월25일 강 부총리방 “환율개입하자… 말자…” 설전/27일“달러매입 자제를…” 대기업에 반위협/30일 외환거래 3일째중단되자 개입 선회/11월14일 금개법싸움속 강 “통과못하면 사표써라” 『어떤 대책을 세웠습니까』 『의견이 엇갈려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결단을 못 내렸습니다』
지난 1월7일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 사무실. 국제통화기금(IMF)행 선언까지 막판 1개월의 상황에 대한 경제분과위원들의 집중 추궁이 계속됐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말끝을 흐렸다. 4일전 재정경제원 관계자들의 답변도 『죄인된 사람이…』 뿐 이었다. IMF 구제금융 신청전까지 외환위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무식한 사람」으로 몰아붙였던 재경원과 한은. 왜 이들은 결론을 못내렸을까. 뒤늦게 죄인이라고 고개를 숙였을까.
지난해 10월25일 하오 강경식 부총리 집무실. 홍콩증시 폭락으로 외환·주식 시장이 붕괴되고 외국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때였다. 윤증현 금융정책실장 이윤재 경제정책국장 등 재경원 간부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야기는 주로 두 사람이 했고 주제는 환율로 모아졌다.
『시장 불안심리를 해소하기위해 (당국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 『가수요만 부추길 뿐이다. 자칫하면 금융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하루환율변동폭을 확대해야 한다』
설전이 계속됐다. 강부총리는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 있었다. 시장경제론자를 자처하는 그로서는 「시장 불개입」쪽. 재경원 A국장의 회고. 『10월들어 환율문제로 정책국과 금정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그 자리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별도로 보고했다』
여기서 재경원의 금정실과 경제정책국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금정실은 구재무부출신들이 핵을 이루고 정책국은 구경제기획원출신의 아성이다. 기획원출신인 강부총리는 금정실 의견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는게 정설이다. 재무부출신 국장의 고백. 『강장관은 간부 간담회를 하다가도 윤실장이 들어서면 화제를 바꾸곤했다. 금정실 과장들에게 따뜻한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금정실이란 기획원출신들에겐 관치금융의 소굴정도로 비쳤을 뿐이다』
같은날 한은 회의실. 이총재와 최연종 부총재가 번갈아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외환사정이 심각하다』 『환율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대외지급 제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의 자금조달 등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칼자루는 재경원이 쥐고 있었다.
그후 재경원의 회의는 자주 열렸지만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재경원 고위간부 B씨의 설명. 『강부총리는 환율에 관해 명확한 입장이 없었다. 처음에는 시장에 맡기자고 했다가 나중엔 개입쪽으로, 그뒤엔 아예 손을 놓았다』 외환사정은 갈수록 악화했고, 간부들은 저마다 답답하다는 표정뿐이었다.
10월27일 상오 9시30분. 재경원 5층 외화자금과.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목소리. 『도와주셔야 합니다』 금융기관과 대기업에 달러 매입 자제를 요청하는 전화공세였다. 재경원의 「반위협」에 외환시장은 잠시 안정되는 듯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환율은 이튿날 가격제한폭까지 올라 거래자체가 중단됐다.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던 주가 500선도 붕괴됐다. 하오 9시30분. 빅3는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머리를 맞댔다. 환율변동폭을 확대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채권시장 조기개방과 현금차관확대, 외환매입 제한조치를 골자로 하는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다음날(29일) 발표했다.
10월30일. 외환시장은 또 거래가 중단됐다. 연 3일째. 개장 8분만이었다. 재경원 금정실에선 불만이 터져 나왔다. 『930원선을 넘었을 때 강력히 틀어쥐었어야 하는 건데』 상오 11시. 외환실무과장이 외환시장에 선전포고를 했다. 『(강부총리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았다. 지금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유효하고 강력한 수단을 동원, 불안심리를 잠재우겠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공식개입」쪽으로의 급선회였다. 재경원 간부 C씨의 증언. 『금정실은 최소한 11월3일까지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외환딜러들은 급작스런 정책변경에 아연실색했다. 한은의 반응은 한마디로 『(현재 외환보유고로는) 무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강행했다. 외환매입제한조치도 이날로 앞당겨졌다. 환전창구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전날 재경원은 외환예금이나 달러화를 매입하는 것을 제한하겠다고 밝혔으나, 한은은 1만달러이상 환전시 실수요증명서를 제출받도록 은행들에 조치했다가 뒤늦게 철회하는등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난파위기에 핵심당국자들의 손발이 맞지 않았다.
재경원과 한은은 금융개혁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강부총리가 취임직후 금융개혁위원회에 개혁안을 조기에 마련해달라고 주문한 3월11일이후 관련법안이 통과된 12월29일까지. 어느 때 보다 자주 만났으면서도 결론이 뒤처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11월14일 상오 10시 국회 재경위 회의실. IMF 구제금융신청건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의 정식재가를 받은 강부총리는 복도에 늘어선 한은 관계자들을 비집고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금개법안 반대파인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은 13명중 10명, 찬성쪽인 신한국당 민주당 의원은 16명중 7명이 참석했다. 표결처리할 예정이었으나 수가 부족했다.
강부총리는 재경원 간부들에게 여당의원들의 소재파악을 지시했다. 전날 강부총리는 『이번에 통과되지 못하면 사표 쓸 각오를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재경원 직원들은 전화통에 매달렸다. 같은 시각, 한은본점의 1층로비는 법안통과 저지열기로 가득했다. 낮12시 증권·보험감독원 노조와 함께 「한은법 개악 및 금융감독원 설립 원천무효를 위한 규탄대회」가 열렸다. 관련법률안 재경위 통과시 총파업 돌입을 결의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환란에 침몰하고 있던 그 며칠간. 재경원은 전화 등으로 의원들을 설득하기 바빴고, 한은은 의원 집앞,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당사, 국회의사장, 거리에서 법안통과저지를 호소하며 쏘다녔다. 외환대책마련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금융개혁법안의 골자는 한은 독립성 강화와 감독권의 통합. 대기업의 과다한 차입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한은에서 은행감독원을 분리, 증권·보험감독원과 통합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통화관리에도 감독기능이 필요한 만큼 완전분리해서는 안된다는 게 한은의 주장. 명분은 그럴듯 하지만 결국 조직 및 권한축소를 둘러싼 「밥 그릇」다툼이었다. 때문에 양측 모두 사활을 걸었다. 88년과 95년의 중앙은행법 파동의 재판이었다.
금융개혁법안은 결국 IMF 권고로 통과됐다. 만일 법안이 11월에 통과됐다면 IMF 구제금융은 피할 수 있었을까. 강부총리의 회고. 『IMF에 가는 것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IMF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처럼 어려움에 빠지지는 않았겠지만』 강부총리는 11월 10일 마련한 금융시장안정대책을 법안통과에 연계시켰다가 9일이 지나서야 발표했다. 마지막까지 때를 놓친 것이다.
재경원과 한은이 대립만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강부총리는 이총재 김인호 청와대경제수석 등과 수시로 회동을 갖고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실무자들은 종종 의견을 같이 했다. 빅 3가 모두 옛 경제기획원 출신이듯 금정실과 한은은 구 재무부출신이 주축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었다.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8월24일 하오 4시. 서울 여의도 기술신용보증기금 부총리 사무실. 한중수교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후 귀국한 강부총리는 곧바로 재경원과 한은 실무대책회의를 주재했다. 기아사태로 곤경에 빠진 제일은행과 종금사의 처리방안 마련이 급했던 상황. 재경원에서 강만수 차관 윤금융정책실장, 한은에서 최부총재 김원태 이사 박철 자금부장 등이 참석했다.
『제일은행에 특융지원이 필요하다』(한은) 『은행하나 쓰러진다고 뭐가 문제냐. 시장원리대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은행도 예외일 수 없다』(강부총리) 『제일은행을 저대로 두면 자기자본이 줄어 대기업 여신을 회수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한은) 『유동성은 지원해 줄 수 있다. 국제결제은행기준 자기자본비율만 높여주면 된다. 현물출자로 하자』(강부총리) 『대외신인도가 추락해 신용등급이 떨어져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한은) 『대외신인도가 추락하면 어떠냐. 외국은 다 안다』(강부총리) 결국 제일은행에 대해서는 그로부터 10여일뒤 일반대출금리수준의 지원이 이뤄졌다.
특융요구가 나온지 거의 두달만이다. 환란의 와중에서 터져나온 재경원과 한은의 대립,그리고 재경원내 구 재무부라인과 경제기획원라인의 갈등구조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다.
◎IMF가 보는 환란원인/“외환악화 알고도 정부 실기… 실책”/“국제화 떠들면서 리스크관리 못해”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경제수석 등은 우리나라 외환위기는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며,이는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도 나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금융개혁법안을 제때 처리하지 않은 정치권에도 책임을 돌리고 있다. 과연 그럴까. IMF나 금융전문가들은 정부의 실기와 실책도 지적하고 있다.
IMF 실무협의단 보고서 내용. 『한국의 외부자금조달 상황은 10월23일 홍콩증시폭락과 함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사가 국가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면서 10월 말 이후 급속히 악화했다. 동남아사태 영향도 있었지만 위기의 규모와 속도는 상당부분 한국의 금융 및 기업부문의 근본적인 취약성에서 비롯됐다. 당국의 정책은 부분적인 대응에 그쳤고 시장을 안정시키는데 실패했다. 97년 8월25일 외환자금 조달의 어려움에 대응해 정부는 금융기관의 대외채무를 보증한다는 공식선언을 했다. 그러나 정부보증에 따른 법적인 절차와 국회 승인이 없었기 때문에 보증의 법적 지위가 불확실했다. 결국 이러한 정책들은 시장의 신뢰를 전혀 회복하지 못했다. 시장신뢰는 금융개혁위원회의 건의를 토대로 만들어진 금융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함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최근의 통화정책은 외환시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10월말 외환수급사정이 급속히 악화했는데도 불구하고 당국은 11월21일까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지 않음으로써 시장분위기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외환보유고의 상당부분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한국은행은 외환보유고를 국내은행 해외지점과 현지법인에 예치했고, 이는 만기연장이 되지 않는 단기부채를 갚는데 활용됐으며 결국 외환보유고의 급격한 고갈로 이어졌다』
「미스터 엔화」로 불리는 일본 대장성 사카키바라 재무관 분석. 『한국이 외환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것은 일본정부로서도 97년 8, 9월까지는 솔직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한국의 경우 한마디로 고성장에 이어 금융의 국제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리스크관리가 이에 따라가지 못한데 근본원인이 있다』
□특별취재반
이상호 경제부차장대우
정희경 경제부 기자
이성철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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