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재계의 그룹별 인사 내용이 지면을 장식한다. 일부 그룹은 올해도 예외없이 같은 관행을 되풀이했다. 인사권자인 재벌총수가 소속계열사 임원들에게 자리를 주는 일이니 얼핏 보면 흠잡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행 회사법상 이같은 인사절차는 명백히 탈법행위다. 주식회사에서 임원의 임면 권한은 주주총회가 갖는다. 총수가 대표이사를 먼저 정해 발표한 뒤 주총이 추인하는 식은 적법한 수순이 아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재벌총수들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대표이사를 맡지 않은 채 상법에도 없는 「회장」직함 하나로 수십개 계열사의 경영을 좌우해 왔다. 경영 실패로 수백억원씩 손해가 나도 해당기업 사장을 갈아치우면 그 뿐, 병풍 뒤의 「왕회장」은 책임지는 일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는 6일 30대재벌 총수들에게 회장실·기획조정실을 이번 주총에서 자율 정리하라고 요구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회장실·기획조정실을 계속 운영할 경우 기업 공금의 전용에 대해 형사·민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당선자측의 「배후경영」 중단 요구는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실천돼야 할 과제다. 문어발 확장, 선단식 경영, 계열사간 내부거래, 정경유착용 비자금 조성 및 배분등 그동안 지적돼 온 재벌의 각종 폐해는 바로 그 지휘소인 회장실과 기조실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는 과감한 투자결정등 회장실의 순기능도 많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반도체회사가 수조원씩 순익을 낼 때 그 돈이 재투자돼 경쟁력 확충에 쓰이기보다 엉뚱한 계열사로 흘러가 녹아버린 사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남은 문제는 입법과정이다. 정치권은 흔히 총론에 찬성하다가 입법에 들어가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거나 알맹이는 빼고 허울만 남겨 통과시키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재벌들이 온갖 논리를 앞세워 물밑로비에 나설 것이 뻔하다. 국회가 여소야대 상황이므로 생각하면 더욱 걱정스럽다.
재벌개혁 입법의 중대성을 감안할 때 차라리 상임위나 본회의 표결과정에서 찬반 명단을 공개할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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