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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 새 소설집 ‘플라스틱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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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희 새 소설집 ‘플라스틱 섹스’

입력
1998.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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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혁’접고 ‘일상의 변화’ 실험/생식의 억압서 탈피/소외받는 여성성의 인간적 연대통해/섹스의 구조변동 꿈꿔 소설가 이남희(40)씨의 네번째 중단편집 「플라스틱 섹스」(창작과 비평사 발행)는 제목도 그렇지만 우선 소설집의 표지가 눈길을 끈다. 데 기리코의 그림 「거리의 신비와 우수」. 황톳빛 같은 어두운 노랑과 암울한 초록이 지배하고 있는 화면, 몇 개인지 셀 수 없는 어두운 회랑을 가진 건물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길 한쪽에서 어린 소녀가 머리를 날리며 굴렁쇠를 굴리고 있다. 그런데 그 맞은 편에 그림자 하나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소녀를 금방이라도 해할듯, 음울한 그림자이다.

 이씨는 왜 이 그림을 자신의 소설집 표지로 했을까. 그리고 플라스틱 섹스는 또 무엇일까. 이씨는 86년 등단한 뒤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지난 시절 교육현장이나 노동현장의 폭압적인 현실을 고발하거나 그 고통의 연대를 힘겹게 통과한 세대들의 의식을 그려온 작가다. 기리코의 그림은 이번 소설집에 실린 그의 단편 「어두운 열정­플라스틱 섹스Ⅲ」에 잠시 언급된다. 주인공 은명이 연하의 동성애자 초록이를 찾아나섰다가 초록이의 전 애인인 이혼녀 최애희를 만나는 장면에서다.

 이씨는 플라스틱 섹스라는 개념으로 임신이나 출산의 억압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관계로서의 성을 말하려 한다. 그가 추구하는 또 다른 사회현실이다. 기술과 과학의 발달에 따른 사회변화에 따라 성도 이제 「생식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놀이로서의 성」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녀간의 성만이 성이 아니라 동성애가 자연스런 성의 한 형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본명이나 부모, 성장과정 등을 묻는 은명에게 『그딴 게 나란 인간이랑 무슨 상관 있다고 자꾸 캐는 거야』라며 기존사회의 모든 획일적 판단기준에 반기를 드는 배짱있는 동성애자 초록이는 그 이념의 체현자로 묘사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댁도 아마 우리 나이에는 변화를 요구하면서 청춘을 보냈겠죠…정치나 사회의 민주화니 하는 것들. 이젠 시대가 달라졌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소한 일상성에서의 변화들이라구요. 이젠 섹스에서도 그 관념보다는 일상성에서의 구조변동이 필요하다는 거죠. 일대일의 관계에서의 변화요』 논리적으로 그럴 수 있을 것같다. 일상성에서의 구조변동, 마치 비누거품 놀이에서 공중으로 날려가는 비누방울 같이 단자화된 개인들이 스스로의 방울을 터뜨리고 소통 가능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소외받는 여성성의 연대가 이로 가능하다는 점에서 희망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왠지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 새로운 인간관계라는 것이 일면 암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기리코의 그림을 탁 대면할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더구나 IMF라는 지각변동이 있기 전과 후의 세상을 생각한다면 말이다(이씨의 작품들은 물론 IMF 이전에 씌어진 것들이다).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로 일하며 「사회의 윤리니, 보통 사람들의 도덕이니 불편이니, 건강이 어쩌구, 인생을 보람있게 만들고 어쩌구 하는 말이 나올 꿈도 꾸지 못하는」 분위기의 홍대 앞 지하카페에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이십대 초반의 초록이 같은 인간상이 지금도 가능하며 그같은 인간상의 소설적 추구도 유의미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이때문이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도 그렇듯 이번 소설집에 담긴 작가의 의식은 여전히 강렬하고 문제적이다. 플라스틱 섹스 연작 외에 「당신이 말한 것에 대해 그녀가 말하는 것」 등에서 토해놓는 이 땅 여성의 삶의 질곡은 공명을 일으키기 충분하다. 소설이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씨에게 플라스틱 섹스가 쓰여진 이후 최근 우리 사회변화의 소설적 형상화를 요구하고 싶다.<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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