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없었다면 근대서양/운명은 엉뚱한 방향으로… 메디치가(가). 1434년부터 1737년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지배한 가문이다. 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피우스 4세, 레오 11세 등 4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유럽 여러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메디치가가 세계사에 굵은 글씨로 기록되는 이유는 그 권력에 있지 않다. 메디치가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라고 하는 15, 16세기 서양 예술과 학문의 황금기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없었다면 계몽주의도 불가능했고 계몽주의가 아니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을 비롯한 서양근대의 운명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특히 「위대한 자」 로렌초로 일컬어지는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노련한 정치가이면서 당대 유럽 최고의 예술과 문학 후원자였다. 자신이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세 아들 중 줄리아노는 교황 레오 10세가 됐다. 로렌초의 후원이 없었다면 보티첼리같은 대가들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사학자 G.F.영이 쓴 「메디치」는 「풍문」 수준으로만 알고 있는 메디치가의 영광을 67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파고 든다. 이 가문의 탄생, 집권, 몰락의 이야기는 바로 당대 유럽의 국제관계와 학문과 예술과 과학의 이야기다. 이 책은 영어로 된 종합적인 메디치가 연구서로는 유일한 것으로 꼽히는 고전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게 썼기 때문에 마치 소설을 읽는 듯 흥미진진하다.
영은 책을 맺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메디치가의 역사가 참으로 장엄하다며 「메디치가를 대리석으로 된 그들의 묘에서 편히 쉬게 해야 한다. 그들은 어느 왕과 제후와 황제보다 세상을 빛내는 데 더 큰 일을 해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 그들에 대해 「세상의 덧없는 영광」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들 시대의 다른 군주들은 자기 개인의 영광에 관한 기억밖에 남긴 게 없고 그 영광마저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지만 메디치가는 보다 항구적인 어떤 것을 남겼다.
인류에게 유익함의 원천이 되고 가장 고상한 형태의 기쁨을 주며 시시하고 하찮은 모든 것을 떨쳐내고 우리를 고양시키는 대가들의 예술작품을 우리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메디치가 덕분이다. 이 사실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들이 다른 분야, 즉 학문에서 이뤄낸 업적이다. 이것이 지식을 멀리 그리고 널리 전파했고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는 유익함을 가져다줬다. 이것이 메디치가의 영광이다. 이 영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667쪽). 신학·역사 전문번역가 이길상씨가 옮겼다.
현대지성사 발행/1만3,000원.<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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