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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수준을 낮추자/이근후 이화여대 의대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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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수준을 낮추자/이근후 이화여대 의대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8.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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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상실감으로 가득했던 연말의 IMF한파가 해를 넘기면서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그 시발의 정축년은 역사속으로 숨어버렸지만 새해 무인년이 열리면서 파고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다. 택시를 탔더니 한 기사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극언을 토했다. 『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들을 사형시켜야 합니다. 구렁이 담넘어가듯 어물쩍 한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겁니다』 금방이라도 일이 벌어질 것 같은 태세다. 분노를 삭이지 못한 그의 흥분은 내가 택시를 타고 있는 동안 내내 끓는듯 했다.

 『희망이 없잖아요. 우리같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열심히 김밥을 말며 살아온 한 아주머니의 풀죽은 목소리다. 이 이상 어떻게 허리띠를 졸라매며, 지금까지 흥청망청 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누군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하고 망연자실하는 모습이다. 상실감이다.

 분노의 끝은 파괴적인 힘을 갖는다. 분노의 대상이 타인이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고 그 대상이 자신이면 자살로 이어지는 메카니즘을 지닌다. 택시기사와 같은 분노가 행동화하면 타인파괴적으로 흐르겠지만 김밥아주머니와 같은 상실감은 자신에게로 향할 가능성이 많다.

 이런 메카니즘은 물론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인격성향이나 주변환경에 적응하는 양식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사회적 충격은 다분히 개인의 통제를 벗어나 사회적 행태를 띨 수 밖에 없다. 분노와 상실감이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다. 생각해 보면 IMF 구제금융은 열심히 살았던 선의의 많은 이들에게는 여간 충격스런 일이 아니다. 위정자들은 적어도 이런 사회집단적 변수를 깊이 염두에 두고 해법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지혜를 모으기 위해 몇가지 방편을 생각해 본다. 첫째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정신을 바로 차려야 현실이 바로 보인다. 충격이긴 하지만 겁먹지 말자. 겁을 먹으면 위축되고 위축되면 희망을 잃는다. 희망을 잃으면 소생할 수 있는 잠재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런 결과가 오자면 그만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말초적인 대증요법으로는 소생시킬 수가 없다. 그 대책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이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타성을 버리지 않으면 일시적으로는 상황이 호전될지 몰라도 언젠가는 다시 이런 참담함이 되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행이 위기를 불렀기 때문에 그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허세를 버리는 일이다. 허세를 부리지 않더라도 자신을 확고히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열등감이든 이를 감추려는 행동성향이 허세와 연결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아방어기제가운데 첫손가락 꼽히는 것이 허세라는 점을 심각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로는 당장의 불을 꺼야 한다. 지금 당장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대증요법도 필요하다. 우선 살아남기를 해야 한다. 살아남자면 중환자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된다. 중환자는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최소한의 기초대사량을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위기에 처한 우리들의 적응은 응당 사회적 최소한의 욕구충족으로 자세를 낮추는 것이어야 한다. 더 이상 나는 낮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급하고 어떤 것이 덜 급한가, 완급을 가릴 혜안이 있어야 한다. 불요불급한 것은 과감히 미루고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대사량으로 기대수준을 낮추어야 한다. 겨울이 되면 모든 나무들이 잎새를 떨군다. 이것은 낭만이 아니다. 이듬해 새싹을 틔우기 위한 자구책인 것이다.

 네번째로는 힘을 모아야 한다.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위정자나 기득권자들의 뼈를 깎는 반성과 실천적 의지가 결여된다면 살아남기 어렵다. 획일적이고 경직된 습관적 반응만으로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 감정적인 대응만으로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설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 기회에 분노와 상실감을 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겠다.<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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