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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을 찾는 까닭은/류동희 전국부 차장(앞과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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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을 찾는 까닭은/류동희 전국부 차장(앞과 뒤)

입력
1998.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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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고 불이 켜진데가 없었다. 광장은 어둠만이 짙었다. 너무나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의 맨 끝부분이다. 독일 파시즘에 쫓겨 프랑스로 밀입국 망명한 주인공 라비크에게  2차대전 발발은 「절망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 어둠속에서도 그의 눈길은 「희망」을 찾고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베를린 장벽 붕괴」로  비유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무엇보다 「환호」가 없지 않은가. 굴욕감을 가져서는 안되고「감사」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살 1파운드를 떼어내겠다고 칼끝을 들이미는 샤일록 앞에서 미소를 지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를 오늘의 상황에 이르게 한 정경유착의 「크로니(crony) 캐피털리즘」은 철두철미하게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의 「샤일록 캐피털리즘」이 우리의 대안일 수는 없다. 위기의 한국에 대한 월스트리트의 태도는 피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상어떼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들이 내놓은 처방전도 상처입은 다리를 아예 잘라내고 리모트컨트롤로 조종되는 「첨단」의족을 끼우라는 식이었다.

 기동력을 앞세운 독일 전차부대가 진지전 중심의 낡은 전술 패러다임의 정화인 마지노 방어선을 돌파한 것처럼 우리의 「펀더멘탈 마지노선」은 월스트리트의 「컴퓨터화한 비정」에 맥없이 무너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경제논리가 우리의 금과옥조가 될 수 없다. 패배한 프랑스가 파시즘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 봉건주의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없음은 역사가 증명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인 케인즈 혁명을 통해 대공황을 벗어났듯이 우리도 서방의 사상적 파상공세에 난타당하는 「아시아적 가치」 를  모두 폐기해야할 것이 아니라 「케인즈적 변용」을 통해 우리에 적합한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조롱과 폐기요구라는 「신판 단발령」의 어둠속에서 전쟁의 폐허를 딛고 비약적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또 냉전의 질곡속에서 정치의 민주화까지 성취한 우리의 「개선문」을 떠올려 본다. 라비크가 절망의 어둠속에서 개선문을 찾던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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