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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가 너무 삼엄해서(동창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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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가 너무 삼엄해서(동창을 열고)

입력
1998.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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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사 회장의 고희를 축하하는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정말 오랜만에 대통령 당선자를 뵈올 수 있었습니다. 15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치열하던 어느 날 저녁, 제가 맡아서 진행하던 SBS의 생방송 라디오 대담프로에 나오셔서 「왜 김대중이 꼭 대통령이 돼야만 하는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한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그 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제가 보기에 당선되시기 전보다 표정이 많이 굳어지신 것 같았습니다. 제 프로에 나오셨을 때에는 스튜디오에 들어오실 때는 물론 떠나실 때까지 시종여일 미소를 지으시고 농담도 몇마디 하시는 가운데 『나는 이번에 김교수만 밀어주면 잘될 겁니다』라고도 하셨고, 대담 진행중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매우 강하고 대담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나는 사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라고도 하셨는데 그 때의 부드럽던 인간미는 제 눈엔 전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스튜디오를 떠나시기 전에 아나운서 PD들과는 물론 엔지니어들과도 일일이 악수를 나누시면서 정중하게 『고맙다』고 하시던 그 모습이 생각나, 한두달 사이에 세상이 많이 변한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앉을 자리가 하나도 마련돼 있지 않은 장소이어서 줄곧 서 계셔야만 했는데 무표정하게 앞만 보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당선자의 머리 속에는 그 집 주인의 「고희」에 관해서보다는 신정부 출범과 더불어 마땅히 발표돼야 할 각료들의 명단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경제청문회를 열면 처벌의 범위가 어느 정도이면 적절할까』 또는 『인사청문회를 열지 않을 수도 없는데, 여소야대의 국회임을 감안할 때 국무총리 인준부터 혹시 파란이 일지 않을까』 등등의 매우 중대한 정치 현안들을 생각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현직 대통령께서는 정권을 이미 이양한 것이나 다름없이 조용히 계시므로 당선자 자신이 두 사람 몫을 혼자 도맡아 하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믿습니다.

법에 명시되어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연회장 내에 경호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귓속에 무엇인가 하나 꽂고 당선자의 주변을 맴도는 젊고 잘 생긴 남자들은 모두 경호원임이 확실하였습니다. 연회장이 마련된 건물 입구에는 금속탐지기 문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고 경찰이 여자경관까지 포함하여 상당수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저는 혹시 김영삼 현직대통령께서 참석하시는 게 아닌가 착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권총을 품고 들어가는 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삐」소리를 낼 것이 분명한 그 별난 문을 어쩔 수 없이 통과하게 될 때마다 저는 솔직히 말해 기분이 안좋습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그것이 필요악이라 믿고 체념하지만, 비교적 선량한 사람들만이 모이는 연회장에 그런 장치가 꼭 필요할까, 저는 의심합니다. 당선자께서도 언젠가 그 문을 통과하라는 것을 거부하신 적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굴이 너무 많이 알려진 분이라 어려우실지는 모르겠으나 경호원 한두 사람만 대동하고 그런 장소에 몰래 나타나시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그리도 비참하게 살해되셨을 때 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원수는 경호를 삼엄하게 할 필요가 없어. 이 나라는 미국과 달라. 도대체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몇 되지도 않아. 한국의 국가원수는 술좌석에서 옆에 앉는 자만 조심하면 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물어야지. 「어디 가?」 「화장실에 갑니다」하면 「어서 갔다와」하면 될 것이고, 만일 「권총을 가지러 갑니다」라고 하면 「앉아」하고 큰 소리로 야단치면 돼』

저는 제 친구의 고희 연회장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악수 한번 나누는 영광은 누렸으나 카메라를 메고 나온 그 많은 젊은이들과 그리고 거기 깔려 있는 경호원들에게 밀려 고희연 주인공 가까이는 서 있지도 못하고 한동안 아주 먼 거리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경호가 너무 삼엄한 것 같습니다.<김동길·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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