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와 LG에 이어 삼성이 그룹개혁안을 발표했다. 시중의 의견은 그 개혁안이 국민정서와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이 대세이지만, 우리는 개별기업에 대해 따로따로 기대수준을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구체적 개혁수준을 일일이 논란할만큼 개별그룹의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불가능한 일을 여론몰이로 강제할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다만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의 정당성에 관한 논의다. 재벌들은 흔히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활동으로 돈 번 부자가 왜 정권만 바뀌면 개혁과 지탄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못 사는 사람과 그 부를 분배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면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와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항변이 정론으로서 일반국민에게 납득되자면 그들의 기업활동과 부의 축적과정이 민주적 사회질서에 부합하게 정당했느냐는 물음 앞에 떳떳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30대 재벌 가운데 과연 몇개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는 스스로 물어보면 알 것이다.
재벌 옹호론자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며 이윤추구에 그 존재의의가 있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도덕과 윤리가 개재할 이유가 있는가. 섣부른 기업도의론은 오히려 자유경쟁에 의해서만 발전할 수 있는 시장경제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그 이윤추구가 이제까지 공정한 룰에 따라 이루어졌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재벌의 폐해가 논란될 때마다, 정경유착의 비리가 사법처리 대상에 오를 때마다 무수히 지적된 일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재벌에게 요구하는 것은 공정한 룰에 따라 축적된 정당한 부로서 평가받을 수 있는 기업이 돼 달라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만이 자본주의 체제를 우리나라에 굳게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재벌이 사유재산을 처분해 그룹구조 조정에 쓴다든가, 주력업종이 아닌 것은 비록 이윤이 많은 사업이라도 다른 그룹 유사업종과의 발전적 통합(Big Deal)을 위해 과감히 시장에 내놓는다든가 하는 일들은 「고통분담」차원의 도의적 요구가 아니다. 이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축적한 부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공정한 출발선상에 서자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억지가 있고 강제가 있고 불합리가 있다는 것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21일 발표된 삼성의 개혁안 역시 흡족한 수준이 아니다. 이건희회장이 개인재산 1,380억원을 내놓았다고 하나 말썽이 끊이지 않는 자동차 사업에 관한 얘기도 일언반구가 없고, 재벌언론의 대표격인 중앙일보 독립에 대해서도 전부터 늘 하던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재벌의 뜻이 이런 수준이라면 「고통분담」이란 말 자체가 무색해진다. 재벌들이 과연 오늘의 급박한 상황을 바로 인식하고 있는지,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다시 촉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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