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 나이에 소설가 ‘전업’/군더더기 없는 이야기로 굵직굵직한 인간사 풀어내이윤기(51)씨가 창작집 「나비넥타이」(민음사 발행)를 냈다. 그로서는 10년만에 내는 중·단편집이지만 독자로서는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만나는 반가움이 있다.
이씨는 소설가로보다는 번역가로 오히려 더 잘 알려져 있다. 77년 신춘문예에 「하얀 헬리콥터」로 문단에 나왔지만 이후 20여년간 그는 창작이 아닌 번역에 전념했다. 「장미의 이름」을 비롯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 「샤마니즘」 「변신 이야기」 등 종교·신화학 서적까지 그의 손을 거쳐 소개된 번역서는 줄잡아 200여종이 넘는다.
그러던 그가 95년 「나비넥타이」라는 중편을 발표하더니 이후 1년반 정도 기갈들린 사람처럼 자신의 소설들을 써내 놓았다. 이번 창작집에 실린 작품들이다. 「번역을 생업으로 삼다가 아주 소설가로 전업한 듯이 구는」그에게 주위에서는 짓궂게 「뭐하러 이 황성 옛터를 기웃거리느냐」고 묻는다고 이씨는 우스개로 말한다. 그 「황성 옛터」에서,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 이씨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일까.
이씨가 쓰는 것은 굵직굵직한 인간사다. 『내가 진정 관심을 갖는 것은 「사람」과 「책」』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그는 지금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굵은 선으로 시원하게 그려보인다. 근래 우리 소설의 모호성, 안개 같은 장막에 가려진 듯 소설 한 편을 읽고 나도 늘 가슴 한구석에 남던 답답함은 이씨의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걷혀버린다. 20년 안으로 숙련된 솜씨다.
「마음에는 늘 중심을 오로지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으니 이를 항심이라고 하거니와, 기회를 엿보아 사특하게 움직이는 교사한 마음이 있으니 이를 기심이라고 한다」. 단편 「갈매기」에 나오는 구절인데, 소설쓰기에도 항심과 기심이 있다면 「갈매기」는 그 항심과 기심을 참으로 절묘하게 짜 놓은 명편이다. 오피스텔에 사는 「그」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갈매기」같은 항공사 스튜어디스를 만난다. 두번째는 일본을 거쳐 미국가는 비행기에서 만나는 「갈매기」. 기심을 가질 만하다. 우연의 연속은 사람의 만남을 필연으로 보이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자신의 생일 9월1일을 두번째 술자리 만남의 날로 정한 「그」는 그날이 그녀에게는 가혹한 「기념의 날」인 것을 알게 된다. 다름 아닌 부모와 오빠 막내동생의 제삿날, 대한항공 007기 격추 13년이 되는 날이었다. 세번째 만나는 11월11일은 그들에게 항심의 날이 된다. 「그」가 「갈매기」의 주민등록번호를 보고 알아낸 그녀의 생일.
직선적이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문체, 시원시원한 단문에 담겨진 해학적 표현, 동서양의 고전읽기에 바탕했음직한 묵직한 내용까지 이씨의 소설은 고수의 솜씨를 엿보게 한다. 『아직 습작이라 부끄러울뿐』이라고 겸양한 이씨는 『하지만 이제부터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쓰겠다』고 말했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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