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주한 미 대사 만들기(한국의 추억)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주한 미 대사 만들기(한국의 추억)

입력
1998.01.19 00:00
0 0

◎한국 1주만에 아그레망 “초스피드”/상원 우호적 인사청문회… 만장일치 비준/안전·VIP접대법 등 망라/국무부 외교지식 브리핑/CIA·NSA선 특별교육도나는 지난주(1월12일자) 자세히 설명한대로 81년 3월26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주한 미 대사직을 맡아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날 이후 서울에 도착한 7월말까지 4개월동안 우리 부부는 눈코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 세니와 내가 그처럼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해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이는 어찌 보면 한국 부임에 앞서 훌륭한 준비운동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매사가 바삐 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그때보다 분주했던 시절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국과 한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은 본질적으로 막중한 (주한 미 대사의) 임무를 고려할 때 매사가 쉽게 풀릴 것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평범한 한 대학교수가 외교계에 발을 들여놓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을 이해한다면 한층 더 읽는 재미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부부는 당시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쳤고 그만큼 준비과정에서 골치를 앓기도 했다.

물론 대통령의 전화 이후 수도 워싱턴에서는 다양한 정부 기관들이 빗발치듯 전화를 걸어 왔다. 우선 세니와 나는 즉각 치과진료를 포함한 철저한 건강진단을 받고 그 결과를 국무부 의료 사무소에 보냈다.

또 있다. 대통령이 내게 전화를 걸기전부터 나에 관한 예비 신원조회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국무부는 우리 부부의 생활방식을 파악하기 위해 이웃과 친구들을 인터뷰하는 등 조사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국무부는 우리에게 6월 초순에는 워싱턴에 머무는 계획을 세워두는 게 좋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이는 그때까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 집에서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뜻했다.

국무부는 우리가 컬럼비아 집에서 서울에 있는 대사관저로 실어 나를 수 있는 가재도구의 한도를 일러주었다. 집에 두고갈 물건을 보관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무엇을 싣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과연 내 개인 도서관에서 어떤 책들을 가져가는 게 한국에서의 업무수행에 가장 도움이 될까?

그리고는 집을 세놓는 일에도 매달려야 했다. 원래 우리 집에 세들기로 했던 사람이 막판에 약속을 취소, 골치를 썩였다. 다행히 한 의사가 세들겠다고 나서 우리는 6월 일 집을 비워 주었다. 이후 우리는 워싱턴에서 모든 일이 매듭지어 질 때까지 가족과 친지 집에 머물러야했다. 상원에서 나의 임명에 대한 비준이 날 때까지는 어떤 물건도 한국에 부칠 수 없었다. 그런데 상원의 비준은 7월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국무부 한국과는 상원외교위원회 의원들에게 (나의 임명과 관련해)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지를 문의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모두 호의적이었다.

4월과 5월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잡담을 나누었다. 손님중에는 한국계 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친구인 조지아주립대 안낙영 교수는 두번씩이나 방문했다. 동료학자이자 당시 뉴욕 총영사였던 김세진 박사도 축하인사를 전하려고 컬럼비아까지 내려왔다. 그는 슬프게도 내가 서울에 있는 동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뒷날(82년 2월) 도쿄(동경)의 한 호텔에서 화재로 숨진 친한 벗이었던 김태동 박사도 10명의 한국인 재계 인사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들은 때마침 우리 집에 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개발위원회(SDB) 멤버들과 즐겁게 지냈다. 폴 클리블랜드 부부는 4월초 우리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클리블랜드는 예일대 제자인데, 나는 그를 주한 미대사관의 부대사로 추천했다. 그 후 그는 계속해서 다른 대사직에 임명됐다.

우리 부부가 4반세기동안 살았던 컬럼비아시에 대한 의무도 있었다. 세니는 중국요리에 일가견이 있었고 컬럼비아에서 중국요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많은 주민들은 우리에게 축하인사를 전하려고 했고, 우리가 짐을 싸 떠나기 전에 각종 사교모임에 초대했다. 우리는 우리 집과 남의 집을 오가며 서로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예를 들어 세니는 4월 2일, 4일, 그리고 12일에 10명에서 12명의 손님을 초청해 8개 코스에서 10개 코스에 이르는 중국요리를 대접했다.

워싱턴과 뉴욕에서도 나를 만나자는 전화가 수차례 걸려 왔다. 나는 빡빡한 여행일정을 짜야 했고 덕분에 아내도 일복이 터졌다. 예컨대 5월6일 우리 부부는 새벽 5시45분에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아내는 워싱턴행 아침 비행기에 맞춰 나를 컬럼비아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는 그날밤 10시10분에 도착하는 비행기에 맞춰 45분동안 차를 몰고 다시 공항에 나왔다. 5월11일에도 다시 워싱턴에 올라가 13일까지 머물렀다.

서울에서 워싱턴으로 급히 날아온 존 몬조 당시 주한 미대리대사가 우리 부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컬럼비아를 찾아온 적도 있다. 몬조 대리대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을 장식한 세니의 예술적 안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참모들을 모아놓고 『아름다운 한국 궁전양식을 간직한 대사관저에 어울리게 집을 꾸밀 수 있는 적격자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참모들에게 세니가 도착할 때까지는 (관저장식 비용을) 「잘 물어다 저장해 두라」고 농담했다.

그러나 마무리지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국제문제연구소(IIS)의 업무를 매끄럽게 인수인계해 줘야 했다. 가족에 대한 의무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켄터키주 오웬스보로에 살던 나의 누이부부는 우리 개를 맡아 기르기로 했다. 이 개는 몸집이 크고 붙임성이 좋아 각별히 정을 쏟았다. 이 개를 오웬스보로까지 데려다 주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펜실베이니아주에 계신 부모님과도 같이 지내고 싶었다.

우리는 국무부가 5월18일 한국 정부에 대해 나의 대사임명을 승인해 달라는 공식요청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전까지 이 문제는 비공식적으로만 논의됐다. 요청(Request)이란 단어는 서구식 외교 용어로 「아그레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 정부의 승인은 불과 1주일만에 나왔는데 미국 정부쪽에서는 이를 하나의 기록적인 일로 평가했다. 나는 외교절차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사실을 86년 8월 후임인 제임스 R 릴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아그레망을 위해 이원경(이원경) 당시 외무장관을 방문하면서 알게 됐다.

월 초순 우리는 워싱턴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처럼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국무부내 외교연구소(FSI)는 새로 임명된 대사들을 위해 무시무시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를 익살맞게 「신부 학교(Charm School)」라고 부르기도 했다. 6월 2주동안 우리는 온갖 종류의 브리핑과 교육을 받았다. 동아시아 전문학자와 교수라는 나의 경력 때문에 우리 부부는 수차례나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에는 대사와 그 부인에게 기대되는 예비지식 등도 포함돼 있었다. 아내는 다른 문화권에서 생활하면서 겪을 수 있는 충격을 극복하기 위한 특별 「심리 상담」도 받았다. 사실 아시아에서 오래 살았던 아내는 이런 경험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특별교육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아무튼 아역배우 출신으로 가나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셜리 템플(흑인)은 자신의 경험을 정성껏 들려주었다. 그녀는 능숙하고 정말 유능했다.

이밖에 각종수당과 참모지원,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을 포함한 안전 브리핑, 대사관내 예술 프로그램, 정신건강 문제, 직장사기를 높이는 방법, 대사관내 의사소통, VIP와 손님접대, 그리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외교 전문 이용법(외교관들에게는 정말 중요하다) 등을 다룬 수업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정신없이 노트를 했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더 많았다. 한국은 우리 미국에는 가장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나라중 하나였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FSI 수업에는 핀란드와 어퍼 볼타(부르키나파소의 옛이름), 말리, 뉴질랜드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 부임하는 대사들도 있었다. 나는 이들 나라와는 달리 한국은 안보와 군사적 이유로 인해 부임에 앞서 특별한 관심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됐다. 나는 국방부와 중앙정보국(CIA), 그리고 국가안전보장국(NSA)에서 며칠 더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극비정보를 다루는 NSA는 내게 첩보위성과 북한을 감시하는 그밖의 전자통신수단에 관한 개요를 설명해 주었다. 한국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는 나는 이 분야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새로 숙지해야 할 정보량은 엄청났다. 나는 국방부와 CIA, NSA 등이 모두 한국을 가장 중요한 임무지역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워싱턴에서 머문 2주과정은 그야말로 「벼락공부」기간이었다.

미국 헌법 체계상 나는 불가피하게 상원의 비준을 받아야 했다. 이는 내가 상원 외교관계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개별 방문해야 함을 뜻했다. 몇몇 의원들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 위원장은 전직 교수이자 일본계 미국인인 하야카와 S I의원이었다. 일리노이주의 찰스 퍼시 의원도 잘 알았다. 두 사람은 (한국에 관한) 나의 논문들을 읽어본 적이 있어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드디어 나의 지명에 관한 청문회가 81년 7월13일 열렸다. 청문회는 하야카와 의원이 주재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출신인 프리츠 홀링스와 스트롬 서몬드 의원은 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누가 더 유쾌한 용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 경쟁했다. 서몬드 의원은 나의 지명을 밀어붙인 주역이었다. 홀링스 의원은 나와 몇몇 정치적 지명자와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나는 정당에 헌금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임하려는 지역의 전문가이자 학자라는 이유로 지명됐다는 설명이었다. 하야카와 의원은 내가 청문회를 갖기 보다는 위원회 멤버를 학생으로 모시고 세미나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청문회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성취하고 싶은 목표들에 관해 진술할 기회도 주어졌다. 나는 다섯가지의 목표를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첫째,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분명히 한다. 둘째, 양국간 신뢰를 강화한다. 셋째, 문화적 교류와 이해를 증진시킨다. 넷째, 미국의 이익을 촉진한다. 이를 통해 양국은 한국 경제의 역동적 성장으로부터 고루 혜택을 누린다. 다섯째, 비무장지대(DMZ)의 긴장을 완화한다.

나는 임기내내 이들 다섯가지 사항을 명심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위험천만한 북한 정권이 어떠한 오판을 하는 것도 방지하기 위해 한국에 상징적이고도 강력한 미국의 존재가 유지돼야 한다는 외교관계위원장의 말에 동의하면서 내 주장의 결론을 맺었다.

상원은 청문회가 열린 그 주말에 레이건 대통령과 그가 한국에 파견키로 결정한 사람에 대해 만족할만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만장일치로 나의 임명을 비준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81년 7월24일 나는 취임선서를 했다. 이를 기념하는 리셉션이 국무부 외교연회실에서 열렸다. 이 리셉션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지사를 지낸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국대사와 존 C웨스트 여사, 한 홍보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된 나의 제자, 그리고 크로포드 쿡 부부 등이 주관했다. 김용식 주미 한국 대사 부부와 김대사의 후임으로 이제 막 미국에 도착한 유병현 대사 부부 등 많은 한국 친구들도 참석했다. 김대사 부부는 우리가 「신부학교」에 다니는 동안 세니와 나를 만찬에 초대했었다.

펜실베이니아주에 계신 우리 어머니도 리셉션에 참석했다. 하지만 80대중반으로 심장상태가 좋지 않으셨던 아버지께서는 장거리 여행길에 나설 수가 없으셨다. 나는 특별 전화중계를 통해 취임선서의 전 과정을 아버지께 전해드리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윌리엄 클라크 국무부 부장관은 내가 선서를 마치자 200명이 넘는 하객에게 『특별한 손님이 먼 곳에서 이 행사에 귀기울이고 있다』고 말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비밀에 싸인 그 손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라고 얘기할 기회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아버지는 내가 부임하는 나라에서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가정의 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분』이라면서 소감의 결론을 맺었다.

이건 대통령이 내게 전화한 날로부터 정확히 4개월만인 7월26일 아내와 나는 워싱턴을 떠났다. 우리는 사정상 취임선서 리셉션에 참석하지 못한 아들 브래들리 내외를 만나 보기 위해 콜로라도주에 잠시 들렀다. 그리고 미 태평양사령부(CINCPAC)에서 브리핑을 받기 위해 하와이로 날아갔다. 호놀룰루에서는 조이제 박사 등 많은 친구들도 만났다. 그는 당시 하와이 동서연구소의 소장대리를 맡고 있었다. 그 며칠 후 우리는 날짜변경선을 가로질러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인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는 낙천적이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주요 우방인 한국에서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대통령과 사랑하는 조국을 대표하게 됐다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우리 부부는 무척 바빴던 지난 4개월을 훌륭히 보냈다고 결론지었다. 그 기간동안은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가치도 충분했다. 해외로 발령받는 미국 대사들이 부임준비 과정에서의 경험덕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에 우리 부부는 위안을 받았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이종수"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