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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삼화령과 반월성 귀정문(차따라: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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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삼화령과 반월성 귀정문(차따라:35)

입력
1998.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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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3일·9월9일­신라고승 충담 스님에 ‘차한잔’/3월3일 삼짇날 맞아 삼화령 미륵불에 차공양하고 돌아오던 스님이 경덕왕 만나 ‘안민가’ 지으며 차달여 바치니 맛이 특이하고 깊은 향이…해마다 삼월 삼짇날과 구월 중구일이면 경주 남산 삼화령과 옛 신라궁궐터인 반월성 귀정문 자리에는 전국의 차인들이 모여 1,200여년전 충담(생몰미상) 스님을 기리는 차례를 올린다. 지난 86년 경주차인회 최차란씨가 처음 헌다를 한 이후 지금은 손꼽히는 전국적인 차잔치로 자리 잡았다.

「삼국유사 경덕왕(재위 742∼765) 충담사편」에 「3월3일 왕이 귀정문에 올라 “누가 영광된 일을 할 스님을 데려 올 수 있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때 외모가 엄숙하고 깨끗한 스님이 지나갔다. 신하들이 인도하여 왕을 뵙게 하였다. 왕은 “내가 말하는 영광된 일을 할 스님이 아니다”하고 물리쳤다. 다시 한 스님이 해어진 장삼차림에 벚나무통을 걸머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즐겁게 바라 보다가 다락 위로 맞아 들여 벚나무통 속을 보니 다구가 들어 있었다.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묻자 “충담이옵니다”고 아뢰었다.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소승은 해마다 삼짇날과 중구날이면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공양하옵는데 오늘도 공양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 옵니다”라 했다. 왕이 “과인에게도 차 한사발을 갈라 줄 것이 있겠느냐”라고 하니 스님은 곧 차를 달여 바쳤는데, 맛이 특이하고 사발안에 향기가 깊게 풍겼다. 왕이 “과인이 일찌기 듣건대 대사가 기파랑을 기린 사뇌가는 그 뜻이 매우 높다던데 과연 그러하냐”하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과인을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케하는 노래를 지으라”하니 그 자리서 지은 노래가 안민가이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미시라/ 백성은 즐거운 아이로 여기시니/ 백성이 은혜를 알리다/ 구물거리며 사는 물생들/ 이를 먹여 다스리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느냐/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리이다/ 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이다」

「다도학」을 쓴 김명배씨는 경덕왕과 충담 사이에 있었던 일을 화랑을 관리로 뽑아 쓰기 위한 시험의 한 형태로 해석했다. 차를 다리도록 한 것은 다도의 깊이로 화랑으로서의 수련정도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노래를 짓도록 해 가악 즐기기를 평가하기 위한 것으로 본 것이다. 김씨는 또 충담이 메고 다닌 벚나무통을 포함한 다구는 화랑들의 산천유람을 위해 고안된 야외용 다구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주 황남동 천마총에서 보면 동쪽이 첨성대, 첨성대 남쪽이 사적 16호 반월성터다. 반월성은 뒤로는 반원 모양의 내가 흐르고 앞에는 성벽을 쌓아 반달모양을 이루었던 성이었다. 귀정문은 남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여러 문 가운데 하나였다. 귀정문 자리는 나무가 무성한 반월성 성벽자리 움푹 패인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월성에는 또 경덕왕 19년(760년) 4월 초하루 두개의 태양이 나타나는 괴변이 일어 났을 때 도솔가를 지어 이 괴변을 물리친 월명(생몰미상) 스님에게 왕이 다구를 하사한 청양루도 있었다.

삼화령은 포석정에서 남산 허리를 뚫고 돌아가는 포장 안된 길을 택하는 것이 편하다. 6㎞가량 올라가면 서쪽 산비탈 아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차나무를 심고 살았던 용장사터와 3층석탑이 보인다. 이곳 비포장 길에서 올려다 보이는 꼭대기가 삼화령 마루.

마루에 올라 보면 큰 바위가 불룩 나와 있다. 그 위에는 미륵불이 앉아 있던 연화대좌가 남아있다. 지름 2m정도의 둥근 자연석에 복련화를 새겨 놓은 연화대좌위에 앉아 있던 미륵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길이 없다. 일제때 조사기록에는 이 대좌위에 상체가 부서진 촉지항마상의 돌부처가 동쪽을 보고 앉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200m쯤 되는 곳이 부산으로 통하는 언양재이다. 통행이 빈번했던 길목으로 봉우리위에서 미륵불이 고개를 넘나드는 나그네들을 보살폈으리라 믿어지는 곳이다.

삼화령 바로 아래 소나무숲은 생의사가 있었던 절터.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덕왕때 생의라는 스님이 도중사에 있었다.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생의를 데리고 남산 위로 올라 갔다. 그 스님은 한곳에 풀을 매어 표시를 하게 한 다음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이곳에 묻혔으니 선사에게 청하건대 나를 파내어 고개위에 안치해주시오”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나서 그곳을 찾아서 파보니 돌미륵이있어 삼화령위에 안치했다. 그후 선덕왕 13년(644년)에 그곳에 절을 짓고 절이름을 생의사라고 하였다. 그 미륵불이 충담 스님이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공양했다는 미륵세존이다」는 기록이 있다.

삼화령에 서서 보면 발 아래 아직도 듬성듬성 주춧돌이 남아있는 생의사터가 보인다. 미륵불이 놓였던 자리, 연화대좌에서 보면 동쪽으로 석굴암, 북쪽으로 경주 번화가가 한눈에 들어 온다. 세상을 굽어 볼 수 있는 곳에 미륵불을 모셨던 신라사람들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김대성 편집위원>

◎알기쉬운 차입문/찻물중 으뜸은 돌솥에 끓인 ‘수벽탕’/우리나라 곱돌이 천하제일인 만큼 잘만 개발하면 세계적인 차상품/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차회에서는 차를 우려서 내는 사람을 「팽주」라 하고 손님을 「팽객」, 시중을 드는 사람을 「시자」라 한다. 「팽」은 물을 끓인다는 뜻이므로 차를 마시는 일은 바로 물 끓이는 일에서 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이 물을 누가 끓이고, 누가 차를 우리는 가에 따라 차회의 규모가 정해진다.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시대의 차생활은 점잖은 찻자리에서는 주인이 직접 차를 끓여 손님에게 권하지 않고 차동이나 시자가 차를 끓여 날랐다.

그러나 문인적 취미를 가진 차인들은 직접 차를 끓여 마신 것으로 전해진다.찻물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기 위해서인 것으로 해석된다. 포은 정몽주나 정약용은 돌솥에 찻물을 끓이면서 주역의 이치를 생각했다.

아무 그릇에나 물을 끓이면 되겠지라고 할 지 모르지만, 어떤 그릇으로 차를 끓이는 것이 좋은가는 우리 선조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물론 금이나 은으로 된 그릇을 최고로 쳤지만 너무 호사스럽기 때문에 금하였고 대신 옹기나 돌로 된 용기로 찻자리의 운치가 더 하도록 했다. 특히 돌솥에 끓인 물인 「수벽탕」은 자연의 정기가 어린 물이라 하여 찻물 중에서도 으뜸으로 쳤다. 이 돌솥을 만드는 곱돌을 가열하면 원적외선이 나와 음식맛이 좋아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 천하 제일의 곱돌은 우리나라에서 난다. 물을 끓이면 자연의 맑은 정기가 어리는 이 곱돌을 잘만 개발하면, 세계 차시장에 내 놓을 수 있는 천하의 명품이 된다.

이렇듯 검소함 속에서도 제대로 된 맛과 멋을 함께 즐기던 옛 선조들의 풍류를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옛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도 전통을 잇는 방법이지만 그 속에 담긴 실질적인 정신을 찾아가는 것도 참된 차생활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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