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묻힌 기자시절 좌절이 “대권 도전” 인생항로 바꿔「대권의 꿈은 기자시절 뿌리내렸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준비가 잘된 차기대통령감으로 꼽히는 앨 고어(49) 부통령의 기자경력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사회정의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고어가 기자로서의 한계를 절감하자 정치로 방향을 돌렸다며 그의 정계진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고어의 언론활동은 베트남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병연대에 배치된 그는 밤에는 남들처럼 M16소총을 들고 보초를 서는 동시에 낮에는 연대신문인 「랜턴」지 기자로 활약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꽃핀 휴먼 스토리 등을 고향 테네시주 지방신문인 「테네시안」에 기고하기도 했다.
71년 가을 제대한 고어는 곧장 테네시안 편집국으로 달려갔다. 명문 하버드대 출신의 전도유망한 23세 청년은 「진실」을 밝히는 언론의 힘을 굳게 믿었다. 구레나룻에 장발차림의 혈기왕성했던 그는 그러나 정치분야는 한사코 사양했다. 반전을 외쳤던 아버지가 70년 11월 상원 선거에서 패배한데다 그의 표현대로 정치에는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72년에는 그도 정계 취재를 거부할 수 없었지만, 당시 그는 동료들에게 『저런 사람들보다는 내가 더 정치를 잘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대신 그는 기자생활 대부분을 범죄등 사회문제와 환경을 포함한 기획기사 발굴에 매달렸다. 그러던중 74년 1월 대특종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이권이 복잡하게 얽힌 지역개발 문제를 파헤치던 그에게 『허가를 미끼로 의원이 개발업자들에게 뇌물을 요구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는 현장을 잡기위해 폴크스바겐 안에서 몇시간을 웅크린 끝에 이들의 검은 거래를 카메라와 녹음기에 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특종은 회의만을 낳았고 그의 인생항로도 바뀌게 됐다. 법원이 「함정취재」를 비난하면서 명백한 「범죄자」를 풀어준 것이다.
고어는 『법원의 결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를 계기로 기자생활을 접고 「법」을 배우기위해 밴더빌트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그리고는 76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고어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기능은 기자나 정치인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정치인은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소환」할 권리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의 측근들은 『표를 모으는데 혈안이 돼 있는 일반 정치인들과 달리 고어는 국민들을 위해 정보를 모으고 활용하는데 최선을 다한다』고 평한다. 「정보고속도로」라는 개념을 창안하는데도 기자시절의 버릇이 밑거름이 됐다는 설명이다.<이종수 기자>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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