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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정책’ 메스를 대라/오석홍 서울대 교수(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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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정책’ 메스를 대라/오석홍 서울대 교수(아침을 열며)

입력
1998.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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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체제가 살아남고 발전하려면 정체성과 항상성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상황의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 끊임없이 변동해야 한다. 변동하지 못하는 체제는 그 항상성을 지키지 못하고 쇠퇴하거나 사멸한다.한 나라의 정책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정책의 일관성과 계속성을 유지하는 것은 정책성공의 중요한 조건이다. 그와 대등한 중요성을 지니는 성공조건이 또 있는데 그것은 정책의 적응성이다. 끊임없는 환류에 의해 행동수정을 해나가지 못하는 정책과정은 정책실패를 초래한다.

정책의 일관성유지 그리고 적응성확보라는 두가지 가치는 서로 조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가지 가치의 배합비율은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은 정책의 적응성에 아주 큰 비중을 두도록 요구한다.

정책의 재평가와 변환을 요구하는 압력이 매우 드센 까닭은 기존 정책의 난맥상과 격동적 여건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부터 잘못된 정책과 정책환경의 변동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정책들이 너무 많다. 경부고속철도사업의 타당성과 시기적 적합성에 대해 강한 비판이 일고 있다. 시행과정의 부실공사까지 겹쳐 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영종도 국제공항건설사업과 월드컵개최를 위한 시설투자에 대해서도 시비가 일고 있다. 정책적 난제 또는 정책실패의 사례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문민정부의 자랑이었던 금융실명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제도채택의 목표는 포기한 상태이고 그 유지비용만 계속 지출하고 있다. 공직자재산공개제도 역시 눈가리고 아웅하는 체면치레로 전락해있다. 그 밖의 반부패시책들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개혁쓰레기」로 전락했다.

규제완화를 외쳐왔지만 피규제자들은 별로 이를 체감하지 못한다. 참으로 풀어주어야할 규제는 대개 그대로 거머쥐고 있다. 작은 정부구현을 외치고 대증적인 처치를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관료적 팽창주의를 제지하는데 실패했다. 지방자치의 실질적 정착을 위한 제도개혁에는 제대로 착수하지도 못했다. 세계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외환대란을 불러 온 것이다. 상도의 기본을 저버리고 빚으로만 장사하려는 기업가들을 말리지도 못했다. 정책혼란과 실패의 원인 가운데서 변동추세에 대한 예견력부족, 문제진단능력부족, 정책대안선택상의 오류, 집행상의 과오, 저항극복 실패 등은 위정자와 관료들의 질책사유이다. 새 정부는 그러한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바란다.

새 정부는 포괄적인 정책재평가에 서둘러 착수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여건변화로 인해 부적합하게 된 정책들을 적시성있게 개폐해야 한다. 개혁시책이 시급한데도 「무의사결정」으로 책임을 회피해온 문제영역에서는 과단성있는 결정을 해야한다. 처음부터 잘못 입안된 정책이나 시행과정에서 득보다 실이 많은 것으로 판명된 정책을 폐지 또는 시정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실패를 되풀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이 유지되는 이른바 제도화한 정책실패를 청소하는데 용단을 내려야 한다.

한번 저지르면 다시는 폐지하기 어려운 「일수불퇴형」정책 또는 개혁들이 많다. 실효가 없거나 부작용이 큰데도 매몰비용이 너무 크거나 폐지의 명분을 찾지 못해 방치해온 정책들이 새 정부를 가장 괴롭힐 것이다. 폐단이 큰 일수불퇴형 정책들에 대해서도 공론화의 과정을 거치고 국민의 양해를 얻어 메스를 가하는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여러 시정조치를 하고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는데 있어 과욕은 금물이다. 정책의 거품은 빼야 한다. 정책의 적시성을 잃어서는 안되지만 문제의 진단에 철저해야 한다. 해결대안의 성격규명과 선택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유능한 인재들을 동원하고 정책과정에 원활히 참여하게 해야 한다. 정책과정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좋은 정책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지지세력을 확보해야 한다. 저항의 가능성과 그 성격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를 해야한다. 복잡하고 격동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내려면 변혁적 리더십의 탁월한 상상력과 예견력이 필요하다. 범인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는 위대한 대통령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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