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정계 “한반도서 손떼자”/박 정권 통치스타일 비판시각 맞물려/70년대 중반 고립주의 견해 팽배/“내정 과민반응땐 북오판 소지”/청문회 출두 한국안보 중요성 강조80년여름. 미국 전역은 11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 양당의 경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양 진영의 선거전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중요성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특히 동서냉전의 상황에서 점점 비중이 커질 한국과의 안보협력 관계가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냉전이 한창 진행중인 시절이었다. 나는 60년대 말부터 10년도 넘게 한반도가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분쟁과 대결구도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할 지리적 운명을 타고났다고 확신했다.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나의 이런 신념을 글과 연설을 통해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내기 위해 80년 여름에 논문 10여편을 정리하는 작업을 벌였다. 우선 나는 70년 고려대가 후원한 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논문부터 손질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초기의 나의 우려는 71년 10월19일 서울에서 열린 한 회의에 제출했던 논문에 잘 담겨 있다.
나는 논문에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은 향후 세계정치의 향방을 가늠하는 척도역할을 할 수 있다.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기 위해서는 한국 상황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의 급성장과 국민의 단결심, 그리고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지닌 한국은 다가올 태평양 시대에서 균형을 유지하는데 중추 역할을 떠맡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논문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펴내기에 앞서 「사태」는 훨씬 긴박하게 전개됐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뒤 구성된 레이건 선거 캠프의 외교정책자문단 위원으로 위촉됐다. 나는 「한국의 안보와 한미관계」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던 논문들의 사본을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자문단 멤버들에게 배포했다.
이 단행본에는 74년과 75년 미 하원 위원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했던 두개의 보고서가 포함돼 있었다. 이들 보고서는 20여년전 발생했던 기억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요긴한 배경설명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들 보고서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큰 틀안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의 개인적 견해가 그나마 수도 워싱턴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도전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는 공직을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속셈에서 우리의 견해와 호의를 멋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정치풍토에서는 이런 일이 흔히 발생한다. 75년 내가 (의회에서) 한국에 관해 증언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지금은 당시의 일을 한발짝 물러나 덤덤한 마음으로 회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를 생각하면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당시의 사건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73년과 74년 사우스 캐롤라이나대에서 안식년 휴가를 얻어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장기간 머물렀다. 그러던중 나는 74년 여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차미네이드대가 후원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이끌었다. 나는 하와이 체류중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와 국제기구 소위원회에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변화하는 안보관계」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동아시아의 민감한 안보문제에 정통했다고 생각한 나는 기꺼이 나의 견해를 피력하려고 했다. 다행히 나는 당시 하와이를 경유하게 된 두명의 한국인 친구와 한미 안보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었다. 하버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김경원 박사와 통일원(NUB)에 적을 둔 조동하씨가 바로 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한국의 불안을 가져오는 진정한 요인 가운데 몇몇 사안들이 한국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인 일단의 워싱턴 정치인들에 의해 간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당시 하원의 각종 청문회를 주도했던 도널드 프레이저 민주당 의원을 대표적 인물로 꼽았다. 아무튼 나는 74년 7월30일 상·하 합동 소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나는 이 보고서에서 『워싱턴 정계에서 한국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나름의 관측결과를 제시했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 열강들의 이해가 맞물린 동아시아에서 국방과 안보문제에 관해 핵심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국은 또 당시 베트남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데 힘입어 이 지역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반면 북한정권은 한국에 대한 위협적인 수사를 강화하는 한편 비무장지대(DMZ)내 군사분계선에서 남침용 땅굴을 파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한국 정부는 당연히 긴장된 분위기에서 국정을 이끌었고 불안을 느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안보를 의존해 온 동맹국인 미국에서 자신들에 관한 부당한 비난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라도 할 경우 일종의 「강박관념」에 빠져들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나는 미국 일각에서 한국 내정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행위는 북한 김일성 정권의 오판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간단히 말해 나는 미국의 신뢰성과 지역안보는 한국 정부에 대한 우리의 공약과 임무수행 여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이 한국 지도자들과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협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프레이저 위원회에 보낸 메시지의 결론을 맺었다. 즉 『우리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구축한 신뢰성과 지역안보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조치에도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강조했다. 위원회에 대해 민간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고 생각한 나는 한국에 관한 외교정책을 수립하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됐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초반에는 미국의 대한 정책이 엄청난 변화를 겪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과 아시아에 관여해 온 정책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팽배했고, 이같은 반응은 워싱턴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뚜렷이 부각됐다. 특히 윌버 밀스를 비롯한 의원들은 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헨리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외교 게임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공 카드를 구사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한반도를 주무대에서 몰아내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75년에는 또 미국이 베트남에서 완전히 발을 뺐으며 괌 독트린이 선포됐다. 동맹국들이 국방의 짐을 더 많이 떠맡기를 바랐던 미국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 셈이다. 사태가 이렇게 흐르자 서울에서는 안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다소 경직되고 다루기 벅찬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던 한국과의 관계가 살얼음 위를 걷듯 긴장에 휩싸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런 와중에서 미국 정계를 상대로 「제멋대로」 로비활동을 벌였던 박동선씨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스캔들이 터져 나오자 미 의회는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박동선씨 사건은 미국에서 나중에 「코리아게이트(Koreagate)」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워싱턴의 압력 단체들은 또 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되자 박대통령과 한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표적삼아 맹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미 국방부 채널을 통해 잠재적인 한반도 안보위기 상황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속속 입수했다. 안식년 휴가 기간에 한국에 주둔중인 군사기지를 방문하면서 이를 피부로 실감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서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군사력도 눈에 띄게 증강하고 있었다. 특히 75년 4월 실시된 소련의 「오키안(OKEAN) 2」 해군훈련에서 이 지역의 가공할 만한 군사력이 동원되자 일본의 안보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와 더불어 갈수록 심각해지는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에 대한 한국의 우려도 높아졌다. 한국민들은 한국 내정에 대한 미국의 비판적 시각에는 고립주의가 반영돼 있으며 이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정책에 그럴듯한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 의회에서 내놓은 몇몇 성명은 한국민들의 이같은 우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대외원조를 9,300만달러나 삭감하자 긴장국면은 더욱 악화했다.
프레이저 소위원회 청문회는 계속 이어졌고, 나는 75년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 소위에 민간인 자격으로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의원들과 그들의 보좌관들 앞에서 나의 견해를 직접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나는 북한군이 저지를 수 있는 남침위협의 심각성과 한국은 항상 방어적인 입장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각계 각층을 막론하고 한국 사람들은 미국의 고립주의 정서를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민들은 한반도 안보공약에 관한 미국의 의지가 확고부동한지도 의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청문회에서 제기된 한국에 관한 미국의 비판은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청문회에서 돌출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서울의 정책에 관한 미국의 매도 여론이 자칫 한반도의 우려와 불안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 정부가 매사에 더욱 고삐를 조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 의회도 이런 결과를 낳는 것은 원치 않으리라 확신했다. 나는 또 나보다 앞서 증언했던 제롬 고헨(하버드대 국제정치학) 교수의 견해에 단도직입적으로 이의를 달았다. 그는 결코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전체주의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한 뒤 『한국이 반공을 강조한다고 해서 미국의 안보이해에 무조건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은 김일성이 한국전의 실책을 되풀이해서 다시 남침을 감행하는 빌미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청문회장에는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나는 의원들이 극단적인 찬·반양론으로 갈려 대립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나의 우려는 소위원회 멤버이자 예수교 신부인 드라이넌이 내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현실화했다. 그는 내가 보기에 도리에 맞지 않을 뿐더러 인신 모욕적인 질문을 했다. 어찌됐든 나는 책임있는 학자로서, 전문가로서, 그리고 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청문회에 나온 「손님」의 입장이었다. 나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드라이넌 의원에게 『의원님, 당신은 내가 미국 정부에 고용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나는 순수한 동기에 의문을 표하는 당신의 무례한 태도를 참아야 할 의무도, 의도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문회장에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웅성거림이 쏟아졌다. 그러자 드라이넌 의원도 정도를 지나쳤다고 직감한 듯 투표가 있다면서 서둘러 발언을 마친 뒤 청문회장을 빠져나갔다.
그 다음날 언론은 나의 증언내용과 이 사건을 꽤 비중있게 다루었다. 나의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 미국인들은 주요 맹방인 한국의 생사가 걸린 이해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김일성 정권이 또다시 오판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때로는 긴장되고 때로는 정서적으로 상반되는 맹방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작업이 얼마나 힘든가를 깨달았다.
냉전이 막을 내리고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안보와 관련해 당시와 비슷한 기본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거의 똑같은 논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금도 미국에는 우리가 한국에 존재해야 하는 상징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미국의 존재는 폭력적 수단에 의존하는 북한의 호전성을 억제하는 동시에 동북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한국과 동반자적 입장에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원 위원회에 제출했던 두개의 보고서에서 지적한 많은 부분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80년 당시 200쪽에 달했던 나의 논문들을 읽어본 많은 친구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이듬해 여름 나를 주한 미 대사로 임명했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 번역="이종수" 기자>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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