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한 투자·외채도입 화불러/기아사태 오판으로 결정타로마가 하루 아침에 멸망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제위기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경제계 일각에서는 정부의 실기와 무능을 질책하지만 사실 한국의 금융위기는「예정된」 수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단지 불길한 징후를 미리 찾아 일찍 손을 썼더라면 이처럼 심각한 상태로 치닫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한국 경제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오판은 95년 1·4분기 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당시 엔화가 고평가되고 있을 때였다. 한국의 산업은 일본 산업을 「벤치마킹」해왔기때문에 엔고는 엄청난 호기로 생각됐다. 일본 제품의 수출경쟁력이 떨어진 틈을 타 한국 제품들이 그 자리를 메울 것으로 본 것이다. 정부는 기업에 설비투자를 부추겼고 기업은 이후 2년간 설비투자에 집중했다. 그 사이 경상수지 적자폭은 점차 확대됐다.
그러나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한국제품의 가격경쟁력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커질대로 커진 생산라인은 무용지물이 됐고 재고가 늘어났다. 재고가 쌓이는 가운데 부품과 원자재수입을 위한 달러차입은 계속 이어졌고 경상수지적자는 급속히 불어났다. 문어발 확장으로 재벌의 부채비율은 계속 높아만 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경제위기에 한 몫을 했다. 국제금융계는 OECD 회원국이 될 한국에게 대출해주더라도 돈을 떼일 염려는 없다는 판단하에 한국에 대한 대출을 계속 늘려왔다. 종합금융사들은 기업의 외화조달을 위해 해외에서 200억달러에 달하는 단기채무를 끌어와서 장기로 여신을 해주는 일을 반복했다.
기업의 과잉투자에 대한 불길한 조짐은 97년 연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기업이 하나둘씩 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월 한보철강의 부도를 신호탄으로 대기업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외신인도는 서서히 추락했다. 신인도의 본격적인 추락은 7월 기아그룹 부도유예조치가 촉발제가 됐다. 그 무렵 발생한 동남아 금융위기의 불똥이 한국에도 튀었다. 한국 종합금융사들이 투자한 돈이 대거 동남아 국가들에게 물렸다. 동남아 금융위기에 놀란 해외자본들은 한국의 변제능력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기아그룹 처리를 놓고 당시 강경식 부총리와 김선홍 기아그룹회장이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벌였다. 정부는 부실기업에 대한 처리 의지를 확실히 하지 않은채 여론의 눈치만 살폈다. 정부의 미온적 대책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해외자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외국 금융기관들은 한국 종금사들의 외화차입이나 만기연장을 거절했다.
달러화의 폭등이 시작됐고 환율방어에 나선 한국은행 외환보유고가 고갈됐다. 불안감을 느낀 대기업과 부유층의 환투기가 가속되면서 외환시장이 갑자기 마비됐다. 자금·외환·주식시장이 상호 악영향을 미치면서 전체 금융시스템이 「올 스톱」되는 지경이 됐고 IMF 구제금융신청이 불가피해진 것이다.<조재우 기자>조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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