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로의 새해를 맞고 있다. 엄청난 결의도 있고 못지않은 불확실성도 있다. 십수년의 업보가 지난 한해 터지듯 현실로 나타났듯이 이 한해를 어떻게 보내느냐로 나라의 진로는 가닥이 잡혀지게 된다.1997년은 후에 매우 뜻깊게 기술될 것이다. 하지만 1997년을 체험으로 산 사람들에겐 한가지 분명한 공통인식은 있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했고, 어느 정도 긍지도 가졌던 「우리식」이 더 이상 비방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만각이라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대선열병을 한바탕 치르면서 맞은 이른바 IMF한파로 우리의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었다. 6·25이래의 민족적, 국가적 재난이다. 이 한해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 새해 아침이 벅찬 이유이다.
○제2의 건국하는 자세로
올해는 마침 정부수립 50주년이다. 나라를 세운지 50년만에 그 나라를 통째로 뜯어 고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은 역설이자 섭리이다. 50년을 살아온 「우리 방식」에 대한 엄한 징벌이요 경고다. 이것을 교훈으로 소화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이런 각오로 우리를 개조해야 한다.
비록 우리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닌 타력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IMF사태에서 그 윤곽이 뚜렷해진 「세계가 우리에게 주문하는 것」을 체질화시켜야 한다. 거기에 맞게 우리를 뜯어 고쳐야 한다. 사고방식, 의식구조에서 행동양식, 가치기준에 이르기까지 「아 잘못된 것이었구나」하는 것이 있으면 과감히 바꿔야 한다. 50년 때묻은 옷을 벗어 던지고 세계를 놀라게 할 새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그러자면 힘도 들고 저항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이미 발가벗기워져 있으며 이 기로에서 우리의 선택폭은 매우 제한적이란 것을 상기해야 한다.
올 2월이면 우리는 새대통령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할 마당에 새지도자를 갖게 된 것은 절묘한 일치다. 리더십이 국가와 겨레의 명운에 중요 안한 적이 없지만 1998년부터 우리를 이끌고 나갈 리더십의 무게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중하다.
나라를 통째로 뜯어 고치니 그건 건국이다. 바로 제2의 건국이다. 건국하는 마음으로, 자세로 임해야 한다. 모든 사사로움의 연과 혹독한 단절을 하고, 팔을 크게 벌리고, 국민들의 마음 한복판에 자리잡아야 한다. 스스로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 투명은 꼭 IMF의 주문이 아니더라도 개조라는 대업의 가장 핵심적인 덕목이다. 이래야 리더십은 작동될 수 있다.
지난 한해, 아니 지난 수년간 우리는 리더십 탓을 많이 했다. 그것을 되풀이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의 핵심을 알아야 하듯 우리가 왜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가를 철저히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위기대응이 화급한 시점이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원인규명 청문회라도 열어야 한다. 원인 분석차원이라면 아무리 위급 상황일지라도 못 열 것 없다.
IMF사태 이후 나온 많은 분석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위기는 재벌과 정부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조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해준다. 무모한 차입경영과 문어발,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정경유착, 이 3박자의 해묵은 고질이 이 난국의 발원지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정경유착의 근절, 대기업의 독과점과 불공정거래는 내가 직접 챙기겠다고 한 것은 재벌개혁과 관련, 매우 주목되는 대목이다.
규제완화, 작은 정부란 말을 들어온지도 오랜데 우리 정부 조직이 단출하게, 능률적으로 개편됐다는 소린 아직 없다. 구조개혁의 모범국가로 늘 비유되는 뉴질랜드는 공무원을 근 반으로 줄였고 과감한 민영화, 규제완화로 난국을 돌파할 수 있었다. 비대한 정부조직, 이에 비례한 규제더미, 그 규제와 얽힌 부패가 서로 맞물리고 돌아가는 정부조직이 어떻게 실기없는 정책대응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이 부분에 수술도, 대수술이 있어야 한다.
요즈음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외국언론의 한국보도를 보면서 「아 그동안 세계에 비쳐진 한국이란 이랬었구나」하는 자탄을 하게 된다. 보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간 세계가 좁다하고 누비고 다닌 한국, 한국인. 때로는 당당함으로, 때로는 자신감에 넘쳐 달러 펑펑 쓰고 큰 소리치고 했던 것이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고, 어떤 역풍을 일으킬 수 있는가를 보는 것 같다. 고비용, 저효율이란 우리 경제의 상투어에서 국민들, 근로자들의 탓은 얼마나 되는지도 따져봐야겠다. 툭하면 3D업종이라고 기피하고, 생산성을 웃도는 임금구조, 우리 제조업 근로자의 1인당 생산액이 일본의 3분의 1이라는 기막힌 사실은 어디서 온 것인지도 되새겨봐야 한다.
○세계규격의 「글로벌」인 되자
정부와 대기업이 무책임하게 확산시킨 「발전, 성취 행복감」에 잠시 부화뇌동했을 뿐인데 하는 억울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 근로자들편에서 되돌아볼 것은 많다. 부지런해야 하고, 검소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근거없는 배타나 오만, 허세와 거품, 무례와 자신감의 혼동, 질보다 양만 앞세우는 외형주의, 우물안식 사고를 벗어던져야 한다. 열린 마음의, 신용있는, 국제규격에 맞는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자. 높은 문화의 「글로벌」인으로 거듭나자.
국산품만 쓰는 것이 애국이 아니라는 김당선자의 말은 함축적이다. 우리와 세계와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세계화란 내줄 것은 내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것이다. 속단해선 안되지만 일제히 시작된 외국은행들의 「지원」은 정부와 민간이 일치해서 보인 개혁, 개조 약속이 담보다. 이렇게 하면 회생된다는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지난 날들처럼 말 장난이 돼선 안된다. 세계화가 바로 21세기의 과제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실속있는 샴페인을 다시 터뜨릴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뛰자. 우리는 해야 하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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