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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꿈·용기 “겁날것 없다”/무인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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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꿈·용기 “겁날것 없다”/무인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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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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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기업 보광미디어사장 정자춘씨/“신기술에 길이”/울티마·웹폰시스템…/외국도 탐내는 첨단기술/매년 200% 신장 자신최악의 불경기임에도 이른바 첨단기술을 파는 「잘나가는」 벤처기업들은 끄덕없다. 특히 첨단제품을 수출하는 벤처기업들은 환율이 크게 뛴 덕택에 수익률이 배이상 뛰는 호경기를 맞고있다.

세계최고수준의 주문형반도체 제조기술을 무기로 전자통신장비를 파는 보광미디어(사장 정자춘·38)가 대표적인 사례다. 보광의 올 예상매출액은 지난해의 4배인 200억원. 이중 110억원이 수출분이다. 창업한 지 4년도 안된 신생기업으로 믿기지 않는 초고속성장이다. 정사장은 『6월중 인터넷접속 전화단말기인 「웹폰시스템」 개발을 마치는 등 연내 2, 3개의 기술프로젝트가 완료되면 2002년까지는 매년 200%이상의 매출신장은 문제없다』고 자신한다.

대기업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보광의 기술력은 한국과학기술원 공학박사출신인 정사장을 비롯한 28명의 공학도들의 피땀과 매출액대비 20%가 넘는 연구개발투자가 디딤돌이다. 36명의 직원중 사무직 여직원, 경리 등 일부를 뺀 28명이 보광첨단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이다. 50억원의 매출을 올린 지난해 12억원을 쏟아부었을 만큼 기술개발에 사활을 걸고있다.

『현재의 경제위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남이 흉내내지 못할 기술을 이용,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어 외국에 많이 파는 것 뿐입니다』 정사장은 『외국의 비싼 원자재를 들여와 온갖 공해를 유발한뒤 10%의 이익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얼치기수출방식은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한다』고 강조했다. 「기술만이 살 길이다」는 믿음이다. 실제 보광은 흔한 공장 굴뚝은 커녕 자재창고도 하나없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태광빌딩내 120평 남짓한 사무실이 외형의 전부이다.

보광의 간판기술들은 해외의 첨단기업조차 탐낸다. 12명의 연구인력이 지난 1년간 매달려 양산을 앞두고 있는 웹폰시스템은 미국에서조차 「인포기어」라는 1개 업체만이 생산하고 있다. 컴퓨터주변장치의 처리속도를 현재보다 5배 이상 향상시켜주는 「울티마」라는 반도체 칩세트 제조기술은 이미 개발을 마쳐 미국의 블리츠사와 1,000만달러어치의 공급계약을 한 상태다. 시내전화요금으로 국제전화를 거는 인터넷폰사업의 핵심기술인 게이트웨이 장비 개발도 절반 이상 진척됐다. 개발이 완료되면 세계에서 두번째 성공이다. 보광은 한발더 나아가 세계최고수준의 벤처기업들과 겨루기위해 3월에는 첨단기술의 메카인 미국 실리콘밸리로 진출, 현지법인과 연구소를 세울 예정이다.

정사장은 『기술개발은 제쳐둔채 외형불리기에만 급급해온 대기업들이 겪는 현재의 위기는 불가피한 것』이라며 『벤처기업이라면서 기술개발은 외면하고 대기업의 경영행태를 답습하는 업체가 있다』고 우려했다. 정사장은 『미국을 불황의 늪에서 끌어낸 견인차가 벤처기업이었던 만큼 우리도 알짜배기 벤처기업육성에 사활을 걸어야한다』고 힘주어 말했다.<이동국 기자>

◎광릉수목원 ‘구세주’ 사육사 이명호씨/“내사랑 호랑이”/죽음문턱 한국호랑이/수의사 관두고 박봉자원/이젠 건강 곧 신방준비

무인년 호랑이해를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경기 포천군의 광릉수목원 야생동물원. 사육사 이명호(33)씨가 14㎏이나 되는 소·돼지 생고기를 던져주자 햇볕에 늘어져있던 호랑이 한쌍이 돌연 산천을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말 그대로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것을 이씨가 혼신의 노력으로 살려낸 국내유일의 「백두산 호랑이」다.

94년6월 김영삼 대통령의 중국방문 기념으로 장쩌민(강택민)주석이 기증한 이들 호랑이 한쌍은 55년과 77년 백두산에서 각각 생포된 호랑이의 2, 3세손. 그러나 불과 한해전만 해도 이런 모습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비행기로 수송된 뒤 안정을 취하기도 전에 서울 과천대공원에서 성급하게 이들을 일반에게 공개했고, 이후 서울시와 산림청이 서로 사육을 맡겠다고 다투는 사이 관리 소홀로 수컷은 중병이 들고 말았다.

수호랑이는 원인 모를 병으로 눈꼽이 끼고 230㎏이던 육중한 체구가 90㎏까지 줄어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덩달아 암컷까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호랑이 부부는 94년 12월5일 광릉수목원으로 옮겨졌으나 여기서도 스트레스성 위궤양이라는 성급한 진단에 따라 소화제를 너무 많이 먹이는 바람에 약물중독증세까지 나타났다. 호랑이가 멸종된 남한지역에서 번식을 위한 종호로 사육하겠다는 당국의 의지가 허망하게 무너질 판이었다.

이럴 때 「구세주」로 나타난 것이 이씨였다. 건국대 수의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가축병원을 하고있던 수의사 이씨는 우연히 광릉수목원을 찾았다가 호랑이들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이마 중앙의 선명한 임금 왕자와 양 미간의 큰 대자가 눈에 띈 순간 순수 한국호랑이의 혈통임을 한 눈에 알아봤다』는 이씨는 『병색이 완연한 상태에서도 백두산 호랑이다운 그 장엄한 몸짓에 완전히 반해버렸다』고 회상했다.이씨는 고심끝에 95년 11월 한달 최소한 300만원이 넘는 수입을 올리던 경기 의정부의 병원을 문닫고 의료도구를 챙겨 80만원 봉급의 광릉수목원 계약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씨는 호랑이들을 정밀 진단하고 자비로 웅담을 구입해 먹이는 등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이씨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던 호랑이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차차 식욕을 되찾았고 몸무게도 늘었으며 주변 환경에도 점차 적응해 나갔다. 어느덧 호랑이들은 『이리와』 『저리가』 등의 말을 알아들을 정도로 이씨와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박봉과 격무에도 불구하고 한국 최고의 호랑이를 키우는 이씨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우리 「자식」들을 보세요. 폼새가 위풍당당하고 의젓하지 않습니까. 백수의 왕 답게 결코 가볍게 행동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프더라도 티를 내지 않고 묵묵하게 이겨내죠. 그러나 눈앞에 먹이감이 나타났을 땐 민첩하고 용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씨의 꿈은 말할 것도 없이 이 호랑이 부부의 자손을 퍼뜨려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다. 『호랑이들의 평균 수명이 25세인 점을 감안하면 현재 7, 8세인 이들은 청년기에 접어들어 충분히 수태능력을 갖춘 상태입니다. 이달 말께는 꼭 신방을 차려 주고 싶습니다』

이씨는 서로 격리된 호랑이들이 최근들어 자주 『풋풋풋』 콧소리를 내는 것은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 하는 것이라며 『새끼 호랑이의 탄생과 함께 막혔던 우리의 국운도 활짝 트일 것』이라고 기대했다.<이동준 기자>

◎배달전문 치킨집 사장 이명희씨/“명퇴후 새출발”/하얗게 지샌 숱한밤/정신없이 뛰기 5개월/부모님·아내도 이젠 안심

20년을 근무한 정든 직장에서 명예퇴직한뒤 「통닭구이집 사장」으로 변신한 이명희(41)씨는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로 직장을 떠나야 하는 샐러리맨의 아픔을 잘 안다. 명퇴 5개월여만에 「이제 자리를 잡았다」고 자부하는 그는 『당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그러나 노력하면 살길은 있다』는 말로 새삶의 개척과정을 표현한다.

이씨가 기술직으로 강산이 두번이나 바뀌도록 근무했던 「평생직장」한국통신에서 명예퇴직한 것은 지난해 7월. 회사가 3년전부터 구조조정차원에서 명예퇴직신청을 받기 시작했으나 남의 일로 여겼다. 그러나 민영화 움직임이 빨라져 지난해 초부터 명예퇴직이란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결국 감원으로 가게될 것이라는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신청을 결심하기까지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고교를 졸업한 78년에 입사한 이래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다고 자부해온 그 이기에 정든 회사를 그만둔다는 생각은 가슴을 메이게 했다. 부인은 『대학졸업한 사람도 들어가기 힘든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고 극구 만류했다. 그러나 회사에 계속 매달려있어봐야 더 나은 전망이 없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히고 7월 과감히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창업지원센터를 찾아보고 관련서적을 뒤져본 끝에 택한 사업은 치킨체인점. 친구와 함께 가본 명동의 둘둘치킨 본점의 맛은 기존의 외래치킨 맛과는 달리 우리 맛에 가깝다는 생각에 투자자금과 부대조건들을 들어본뒤 체인점을 내기로 했다. 퇴직금을 밑천으로 전혀 새로운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퇴직후 한달이 다된 시점이었다.

가게는 도봉역 인근. 이 일대는 이미 30여곳이 상호에 치킨이라는 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맥주를 곁들여 어른을 대상으로 하거나 서구적인 입맛을 가진 청소년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이들 업체에 맞서 이씨가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것은 「배달전문」이었다. 15평 남짓한 홀에 배달원 2명을 두고 인근 아파트촌에 치킨배달전단을 수차례 뿌렸다. 뿌린 만큼 거둔다더니 결실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문을 연지 불과 두달만에 매출이 월 1,000만원으로 뛰었고 순수익만 400만원이상을 올렸다. IMF구제금융이후 손님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치킨의 독특하고 연한 맛을 잊지않은 소비자들이 꾸준히 이씨 가게를 찾아주었다.

아직 장담하긴 이르지만 명퇴이후의 새삶을 성공적으로 개척했다는 안도감도 갖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명퇴의 불안감을 한동안 떨쳐내지 못한 아내와 부모님을 안심시킨 것이 가장 큰 결실이다. 체인점을 4,5곳 더 내고 싶다는 이씨는 『최근 퇴직자들이 늘면서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다 사기를 당하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본다』며 『사업의 전망과 계획에 대해 신중히 고려해 투자를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정진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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