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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97년을 보내며(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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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97년을 보내며(사설)

입력
1997.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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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1년이었다. 연말이면 흔히 송구영신을 말하지만 우리가 과연 이 세밑에 무엇을 훌훌 떠나 보낼 수 있으며 무엇을 즐겁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뼈저린 후회와 살을 깎는 걱정 속에 1997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올해 우리는 역사상 처음 야당이 집권하는 평화적 정권교체로 고질적 지역갈등을 해결할 기틀을 마련했다. 경수로사업 착공과 4자회담 예비회담은 남북관계에서 상당한 진전이었으며 황장엽의 망명은 북의 실상을 파악하고 대북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월드컵본선 4회 연속진출, 박찬호 선동렬의 활약은 청량제역할을 했다. 잊혀졌던 군대위안부 이남이씨도 54년만에 혈육을 되찾았다.

그러나 IMF시대는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대단히 잘못 살아 왔음을 뼈아프게 일깨워 주었다. 세계화라는 허구와 선진국이라는 의사환경 속에서 거품의 허망함과 무서움을 모른 채 살아 온 한국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계인들의 눈 앞에 발가벗긴 모습으로 세워졌다. 민주화투쟁이 곧 민주주의인 줄 알아 온 정권의 무능과 실정, 방만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기업확장이 주원인이지만 이 국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을 해왔지만 오늘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의 누적된 결과이다. 총체적 난국의 본질은 신뢰의 위기이다. 사회 각 부문에서 전통적·전근대적 권위가 무너졌으나 민주적 질서에 기초한 신뢰는 형성되지 않았다. 국민은 정부를 믿지 않고 기업끼리 신용을 쌓지 못하며 개인간의 거래와 교류에서도 약속을 경시하는 나라가 해외의 신인을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노력하면 보상을 받으며 줄을 서면 차례가 온다는 믿음을 쌓지 못한 채 우리는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자기만 생각하며 살아 왔다. 그 결과 능력있고 정직한 사람이 실패하는 사회, 명과 실이 다른 사회를 만들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광복 50년이 지나도록 정의와 부정의는 엄격히 재단되지 않고 있다. 내년이면 정부수립 50년인데도 정치·행정은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근대화의 세계적 모델이었던 한국은 선진화로 이행하지 못하고 좌절한 양상이다. 60, 70년대식의 「하면 된다」는 무모함과 편법주의를 동원한 성취의 허상이 드러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을 투명성 합리성 민주성등 3가지 원칙에 따라 전면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IMF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행정조직이나 기업의 구조조정만이 아니다. 남을 배려하거나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의 틀과 삶의 방식을 정착시켜 명과 실이 상부하는 시민사회를 이룩하고 성숙한 세계시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의 한국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너무나 크고 힘겹지만 연면하고 장구한 민족사의 전개과정에서 IMF시대는 짧은 기간일지도 모른다. 사는 법을 고쳐야 한다. 이것이 97년의 냉엄한 교훈이며 새해에 잊지 말아야 할 송년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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