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새해,새 대통령,동서화합 새 기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새해,새 대통령,동서화합 새 기대

입력
1997.12.31 00:00
0 0

◎대선 일주일후 광주/“호남인 한 풀었다는 말은 싫어했던 사람과 손을 잡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됐다는 것”­광주 시민단체 대표15대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쯤 지나자 광주는 며칠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김대중후보의 당선을 축하하던 울긋불긋한 플래카드는 대부분 치워졌고 「무료제공」이나 「축하세일」간판을 내건 가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개표 결과 당선자가 사실상 확정된 19일 새벽 수만명의 인파가 「애국가」와 「남행열차」를 합창했던 전남도청앞 5·18광장의 들뜬 열기는 경제난의 여파인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후보에게 97.3%의 몰표를 몰아줬던 대선 결과는 잊어버리고 모두가 생업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광주시민은 이번 선거 결과가 지역감정 해소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음식점과 술집, 택시 등에서 만난 시민들은 한결같이 『선거를 통한 지역감정 표출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하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 태도였다.

자신을 지역 방송국PD 라고 밝힌 김모(32)씨는 호남의 분위기를 선거 전과 후로 구분해 설명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호남 사람들이 조용했던 것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상대적 반감을 최소화하려했던 것입니다. 「2번이 되면 호남사람들이 설칠 것」이라는 선입견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어서였죠. 그러나 선거가 끝난 지금의 차분한 분위기는 그때와는 다릅니다. 이제는 당선자가 책임있게 국정을 운영하는 데 우리가 발목을 잡으면 안된다는 여론이 형성돼 있어요. 지지후보의 당선만으로도 한을 풀었다는 생각입니다』 음식점에서 만난 시민들도 『지역개발이나 인사에서 「호남몫」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이들이 많았다.

「한을 풀었다」는 표현에 대해서 광주시민연대모임 윤장현대 표는 독특한 해석을 내렸다. 『그것은 복수한다는 표현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호남사람들이 「한을 풀었다」고 말하는 것은 새로운 만남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미워했던 사람,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뜻이죠. 전남 진도의 「씻김굿」이 그렇지 않습니까. 역대 선거 최고의 몰표라는 비관적 현상 속에서도 지역감정 극복의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이런 정서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지역 주민들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지금이 지역감정 극복의 호기이므로 호남인들도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표심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동서의 갈등 양상이 앞으로 쉽사리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도 만만치 않았다. 김대중당선자의 고향인 하의도에 다녀왔다는 택시기사 김모(43)씨는 『지역감정 극복하는 데 호남사람들이 무슨 할 일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수십년간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이 왜 화해와 치유에 나서야 하느냐는 반문이었다. 『공은 이제 영남 사람들에게 넘겨졌다』거나 『우리는 영남사람을 호남사람보다 못하다고 여기지 않지만 영남사람들은 은근히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DJ가 영남사람들이 망쳐놓은 나라를 살리느라고 고생한다』는 말도 있었다.

전남대 정근식(사회학과) 교수도 동서화합에 대한 낙관론을 경계하면서 『정치권 차원의 조치가 정말로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지역감정을 조장해 정치적 이익을 챙겼던 기존의 정치세력이 과거의 정보왜곡에 대해 고백하고 국민들은 이를 철저히 검증해야 합니다. 화합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는데 현재의 정치구조는 이를 가로막고 있어요. 영남을 자극해 정치적 기득권을 누렸던 세력만이 영남사람이 호남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다음 정권, 또 그 다음 정권에서도 이뤄지지 않을 지 몰라요』

하지만 조심스런 입장인 사람들도 이번 선거 결과가 동서화합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이번에 정권이 바뀌지 않았으면 앞으로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형제 가운데 나만 가장 못산다고 불평만 하고 있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 역량을 키워 다른 형제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정치권은 국가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시민단체들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사회교육에 힘을 쏟으면 지역감정은 결국 해소될 수 있습니다』 윤장현대표의 말처럼 많은 광주시민들은 「힘들지만 희망있는 길」위에 서있는 듯 했다.<광주=이상연 기자>

◎대선 일주일후 대구/“어려운 지역경제 살아난다면 호남대통령이 무슨 상관인가 일단은 기대갖고 지켜보겠다”­대구 택시기사

「기호1번 불패 신화 깨져…」

제15대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된 19일 아침, 대구 한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대구·경북에서 1위를 한 후보가 「당연히」 대통령이 되는 그동안의 「대통령 선거 등식」이 깨진 결과에 대한 지역적 당혹감을 이 제목은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었다.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난 24일 성탄 전야의 대구 중구 중앙로. 대구의 중심부인 이곳에서 대통령 선거 직후의 당혹스런 분위기는 그러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수막도 선거벽보도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극심한 지역경제 불황을 반영하듯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보이지 않았고 캐롤마저 거의 끊겨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시민들은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의 완곡한 의사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자가 들러 본 식당과 술집 등에서도 대통령 선거 결과가 화제에 오르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여기 저기를 돈 끝에 어렵사리 몇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 본 대구 민심의 큰 줄기는 「시원섭섭, 혹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정리됐다. 밀어준 후보가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경제난 해결이나 지역갈등 해소 문제에 대해서는 새대통령 당선자에게 기대를 걸어볼만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주조였다.

택시운전을 하는 김수한(52)씨. 『이회창 후보한테 몰표를 모아준 것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지역감정이 이번 선거에도 재연됐다고 하는 모양인데, 적어도 이곳 사람 10명 중 8명은 DJ나 전라도가 싫어서 여당 후보 찍은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업이 택시기사라서 지역의 밑바닥 목소리를 많이 듣고 다닙니다. 대구 여론은 세 후보 중 나라 망친 사람들을 제대로 찾아 법대로 책임을 물을 사람은 이회창씨밖에 없다는 거였어요. 굳이 말하자면 대통령 선거 때 대구 민심은 반DJ가 아니고 반YS였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 당선자 득표율이 대구·경북 모두에서 두자리수를 넘었잖아요. 지역감정 많이 엷어졌고, 새 대통령만 잘하면 아예 해소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는 『가뜩이나 나라살림이 어려운데 밤톨만한 나라가 동서남북으로 갈리면 되겠느냐』며 『부도율 전국 1위인 어려운 지역경제를 살리기만 하면 호남 대통령이 무슨 상관이냐』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서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이곳에서 직장에 다니는 김만성(47)씨도 대체로 동감을 표시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14대 만큼 지역정서가 두드러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누구는 절대로 안된다는 식의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선거운동 당시 「경제 살릴 후보 찍어주자」 「나라가 이 지경인데 한번 바꿔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여론도 만만치 않았구요. 하지만 선거운동 막판에 정치권에서 누구 찍으면 누가 당선된다면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바람에 일부에서 몰표를 몰아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같은 반응들이 진정한 속마음인지 아니면 「희망」의 차원인지 검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역 신문의 제목처럼 「신화」에 익숙해 온 이곳 사람들에게 불안과 우려의 분위기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수성구 범어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조모(37)씨는 『손님들 중에는 「당선자가 평생을 TK때문에 대통령 문턱에서 주저앉은 사람이니 이제 우리는 큰일났다. 정부 지원이 필요한 지하철2호선이나 위천공단 사업이 잘못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불안감을 털어놓는 경우도 꽤 있다』고 전했다.

공무원 이모(36)씨는 『선거 때마다 전라도에서 80∼90%가 넘게 몰표가 나오는 걸 보면 마음이 가다가도 멈춘다. 한풀이 했으니까 앞으로 그럴 일 없다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풀이가 계속되지 않을까 솔직히 불안하다. 요즘 공무원사회에선 「목포의 눈물」이나 「남행열차」 같은 노래를 배우려고 땀께나 빼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틀간 체류하면서 엿들은 대구 시민들의 다양한 이야기들 중에서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와 동서화합을 확신하는 목소리는 아직 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담담한 얼굴 표정과 대화의 마디마디에는 이제는 동서화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론과 그것을 쉽사리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일단은 기대감을 갖고 지켜 보겠다」는 조심스런 입장이 배어 있었다.<대구=황동일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