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한 묘사·따스한 눈길「현대성이란 덧없는 것, 스쳐가는 것, 우연한 것」이라는 보들레르의 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현대성과 싸우는 것은 하성란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예술적 충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첫 소설집 「루빈의 술잔」에 실린 중단편들은 하나같이 작중인물이 경험하는 무상한 현재의 순간을 포착하여 단단히 고정시키려는 집념을 담고 있다.
그의 소설을 특징짓는 묘사감각적 인상을 그 극미한 세목까지 파고 들어 기록하는 묘사는 바로 그러한 집념의 발현이다. 그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에 의해 삶의 현재는 소멸의 위기로부터 구제를 받는다. 현재의 감각적 경험은 찰나적인 것이기를 그치고 어떤 영구한 진실의 상징으로 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성란이 직핍하게 그려낸 특수한 경험들은 인간 현실의 보편적 범주나 유형으로 쉽사리 비약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물질적 이미지의 상태에 머물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회상」의 원리가 그의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상의 부재는 삶의 지속에 대한 감각을 앗아간 현대성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하성란 소설의 분열증적 스타일은 현대성의 경험이 육화된 미적 감각을 표현하는 셈이 된다.
현대성에 대한 감각은 소설의 주제에서도 나타난다. 소설의 삽화들은 생존의 터전을 폐허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장관으로 바꾸는 창조파괴에 결부되어 있다. 작중인물들은 그 발전의 역학에 휘말려 있는 힘없고 외로운 사람들이다. 십년째 같은 직장에서 똑같은 일을 기계처럼 하고 있는 은행원, 시침에 살점을 찔리며 마네킹 노릇을 하는 피팅모델, 십오일째 밤잠을 못자고 도로를 달리는 트럭운전수. 동네 하나가 순식간에 공터로 변하듯이 그렇게 사라질, 가까스로 존재하는 이름없는 사람들이다. 하성란의 묘사는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정교하며, 그들의 억눌린 욕망, 사라진 희망에 따스한 눈길을 던진다. 하성란 같은 신인을 가졌다는 사실은 우리 소설의 상서로운 징후다.<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동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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