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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소비는 필요하다/이제민 연세대 교수·경제학(전문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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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소비는 필요하다/이제민 연세대 교수·경제학(전문가 진단)

입력
1997.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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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검절약 미덕 맞지만 현 상황엔 더 큰 위험/내수기반 다져가며 경제회생 준비해야”경제학자 케인즈는 말을 자주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상황이 조금 달라지기만 하면 영락없이 전에 했던 것과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정치인의 말바꾸기에 신물이 난 한국인에게 케인즈와 같은 경제학자는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케인즈는 한국의 정치인처럼 논리적 근거도 없이 편리한 대로 말을 바꾸지는 않았다.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대해 비판하면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저는 조건이 변하면 결론을 수정한답니다. 귀하는 어떻게 하시는데요?』

케인즈는 항상 현실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다른 대책을 말한 것이다. 그의 이론이 단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케인즈가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현실문제를 남보다 앞질러 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했던데 힘입은 것이다.

지금 한국이 바로 그때 그때의 조건변화에 따라 현실적 처방이 달라야 하는 상황에 있다. 1년전이라면 단기자본 도입을 엄격히 규제하는 것이 정답이었지만 한달여 전부터는 최대한 자유화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정부의 정책이 그 반대로 간 것이 현재의 위기를 불러왔다. 반면 정부가 취한 조치로서 옳은 것으로는 두개 은행을 공기업화 한 것을 들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금융공황이 다가오는 상황하에서 별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국제적 신뢰가 손상되었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앞으로의 대책은 초단기 대책과 달라야 한다. 정부는 국제사회에 약속한 대로 가능한한 빠른 시일 내에 두 은행을 민영화하고 금융구조조정을 실행해야 한다.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은 금융부분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지금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온 국민이 떨쳐 일어나 근검절약운동을 펼치고 있다. 현 경제위기의 궁극적 원인이 국제수지 적자, 즉 투자재원을 국내저축으로 조달할 수 없었던데 있기 때문에 근검절약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사회가 절실히 추구해야할 미덕이다. 더구나 IMF체제를 벗어나는데는 고통을 분담하는 국민적 합의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일부 부유층의 과시소비는 질책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근검절약이 미덕이 되는 것도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한달전까지만 해도 근검절약이 의심의 여지없이 미덕이었다. 현 경제위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그것이 끝나고 난 뒤에는 또 근검절약이 틀림없는 미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계속되는 동안, 특히 새해에는 다르다. 소비위축은 위기를 더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총생산을 결정하는 요인을 뜯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국민총생산은 소비와 투자, 정부지출, 그리고 수출에서 수입을 뺀 것으로 결정된다. 그 중 투자는 경기에 가장 민감한데다 금융기관과 기업의 구조조정까지 겹쳐 곤두박질칠 것이 틀림없다. 환율상승에 따라 수출이 수입보다 빨리 증가하겠지만 투자감소를 보상하는 것은 어림없을 것이다. 정부지출도 IMF와의 협약에 묶여 예년처럼 경기조절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여건 하에서 소비라도 받쳐주어야 경제가 내려앉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증권가격 폭락이 소비 감소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용불안과 임금삭감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근로자,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가가 소비를 늘리지는 않는다. 근검절약 캠페인이나 소비억제정책 없이도 소비는 줄게 돼있다.

소비를 지나치게 억제하면 새해 경제성장률은 IMF와 약속한 2.5% 정도가 아니라 최근 모 연구소에서 예측한 -1.3%에도 미치지 못할지 모른다. 이렇게 되면 다시 금융기관이 부실화하여 공황이 도래할 가능성이 커진다. 반면 우리가 염려하는 국제수지적자는 투자감소와 수출증대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미 이런 추세는 최근의 국제수지 통계에 나타나고 있다.

불황 하에서는 그 누구보다 착실한 저축자, 이를테면 성실한 샐러리맨이 경제에 더 큰 해악을 끼칠지 모른다는 것이 경제이론의 역설이다. 어지간하면 점심을 싸가지고 다니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다니던 설렁탕 집에 계속가는 것이 국민경제에는 도움이 된다. 설렁탕 집주인이 가격을 내려서 손님을 붙들 수 있으면 더욱 좋다.

필자 같은 사람도 앞으로 말을 바꾸어 근검절약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감히 케인즈를 흉내내어서가 아니라 한국경제가 그런 상태로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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