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도 사과도 필요없으니 내 몸을 열여섯 처녀로 되 돌려주세요』 옥양목 치마 저고리 차림의 김학순 할머니가 울음섞인 말로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 일생을 망친 억울함을 호소했다. 91년 12월 6일 도쿄(동경)지방재판소 청사 법조기자실에서 있은 일이다. ◆이 피맺힌 절규는 도쿄 주재 외국기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할머니는 같은해 8월 일본군 군대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 치욕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이날은 태평양전쟁 피해자 33명이 일본 법정에 낸 보상청구소송 원고로서 처음 해외언론에 나선 것이다. 아무 책임이 없다던 일본정부의 말이 거짓임이 온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그 후 국내에서는 물론,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멀리 네덜란드에서까지 일제의 군대위안부 피해자 증언러시가 일어났다. 할머니의 용기있는 결단이 없었던들 피해 당사자 증언이 없는 일제의 군대위안부 만행은 메마른 몇줄의 기록만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버렸을 것이다. ◆그 후 6년간 할머니는 만행의 진상을 널리 알리는 일에 매달렸다.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 결과 유엔 인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ILO) 같은 국제기관이 일제의 위안부 만행을 전쟁범죄로 인정, 국제법에 따른 보상과 사죄를 일본정부에 촉구하게 됐다. ◆엊그제 한많은 일생을 마감한 할머니는 18일 천안 망향의 동산에 묻혔다. 영결식장을 떠난 유해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잠시 머물다 갔다. 대사관 문은 닫혀 있었으나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동료와 후생들의 외침은 큰 메아리가 되어 모두의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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