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걸린 하의도서 북악까지/마침내 인동초가 피었다/54년 3대총선 무소속출마로 정계입문/5대 보선당선 5·16쿠데타로 의원직 박탈/71년 박정희와 대선대결 95만표차 석패/80년 신군부에 ‘내란음모죄’ 사형선고 핍박97년 12월19일 새벽. 역사는 이 순간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우리 역사의 장대한 물줄기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바로 이 순간에 보란듯이 아주 크고 선명하게 그 방향을 틀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 후보가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권교체가 실현된 것이다. 훗날 역사의 평가가 아무리 인색하다 한들 우리의 민주주의에 결코 작지 않은 하나의 「완성」이 이뤄진 것으로 기록될 순간이다. 역사의 물줄기가 방향을 바꿔 제길로 접어든 그 한복판에 정치지도자로서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그리고 인간 김대중이 우뚝 섰다. 이제 그는 혹독했던 민주화투쟁 시절, 「인동초」 「행동하는 양심」 「반국가단체수괴」 등 압제와 고난의 상징으로 그의 이름앞에 놓여졌던 모든 수식어를 뒤로 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로지 국민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다. 이 위기의 시대를 거뜬히 뛰어넘어 21세기로 가는 다리를 놔야 하는 역사적 소명을 안게됐다.
◆재기
김당선자는 94년 5월 미국을 방문했다. 북한의 핵개발 위협으로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고조돼 「제2의 전쟁」설이 분분할 무렵이었다. 그는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북·미관계 개선을 원하는 북한에 미국의 원로급 정치인을 보내 핵문제를 일괄 타결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경론에 기울었던 미국내의 여론이 움직인 탓일까. 미 클린턴행정부는 카터 전대통령을 북한에 보냈고 북한핵 문제는 일괄타결의 길로 접어 들었다.
김당선자는 92년 대선에서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에게 패한뒤 눈물을 머금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만들어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애써 정치를 멀리 했으나 그에게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정치적 결단의 시기가 다시 찾아 왔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정통야당 민주당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는 95년 6·27지자제선거의 지원유세에 참여, 조순씨를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 등 파란을 일으킨뒤 9월 민주당을 떠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어 실시된 96년 4월의 15대 총선결과는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서히 제15대 대선가도에 진입한 그는 노동법 날치기 파동, 한보사태 등의 파고를 넘고 자민련과의 공조, 「DJT연대」성사,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의 합류 등을 이끌어 내며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리고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웠던 그는 마침내 「준비된」이라는 수사를 떼고 대통령이 됐다.
◆고난의 가시밭길
김당선자가 정치에 입문한 동기는 비장하면서도 오히려 소박했다. 그는 6·25를 겪으면서 「국민들에게 이처럼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선 바른 정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그가 정치를 시작한 이후 줄곧 고통을 받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정치초년병으로서의 그의 역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54년 고향인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 첫 고배를 마셨다. 이어 강원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참여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두 아들을 낳은 첫부인(차용애)과 사별한 것도 계속된 낙선으로 인한 시련 때문이었다. 김당선자가 이 와중에서 장면 박사를 만나 정치를 배우면서 가톨릭 신앙을 얻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61년 제5대 인제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됐으나 그마저도 5·16 쿠데타로 의원등록도 못해보고 의원직을 박탈당해야만 했다. 박정희정권의 등장은 야당외길을 걸으며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졌던 그에겐 머지않아 형극의 시대가 도래함을 예고했다. 5·16후 군정기간에 세차례 투옥되기도 했지만 62년엔 당시 YWCA총무였던 현재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나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를 찾았다. 63년 제6대 총선때 목포에서 다시 당선됐다. 그는 타고난 지략과 달변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야당의 대변인이자 「재경통」으로 명성을 날리며 장래가 촉망되는 정치인이 됐다. 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김영삼씨에게 패했으나 「40대기수론」을 내걸고 실시된 70년 대통령후보 경선에선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 후보에 지명됐다. 제1야당 신민당의 대통령후보로 박정희후보와 맞대결을 펼친 결과는 95만표 차이의 석패였다. 4전5기로 이어지는 대권도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형선고와 민주지도자
80년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에 의해 짧았던 「서울의 봄」이 무참히 짓밟혔을 때 김당선자에겐 혹독한 시련이 다시 다가왔다. 계엄당국은 그를 「내란음모죄」로 기소했고 급기야 사형을 선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아래서 이미 세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이제 다시 민주주의와 목숨을 맞바꾸게 된 것이다. 그는 유언인 최후진술에서 『이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최후진술을 할 때 그는 더이상 탄압받는 「민주투사」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이 땅의 「최고지도자」가 돼 있었다. 국제여론이 들끓었고 미국정부는 직·간접으로 전두환정권에 압력을 가했다. 사형에서 무기로, 다시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면서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당선자는 82년말 군사정권의 압력에 따라 미국으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에 있으면서 국내의 김영삼씨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고 85년 2월엔 2·12총선을 앞두고 귀국을 감행했다. 김포공항에 몰려든 30만 인파는 국민이 그를 잊지 않고 있었음을 웅변해 주었다. 2·12총선에서 압승한 그는 나아가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 결국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소년 김대중
소년 김대중은 섬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고 자랐다. 그는 지금도 바다가 보이는 작은 언덕에 기와집 한채를 짓고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25년 12월3일(호적기준)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가량 떨어진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에서 일본인 지주의 땅을 소작하던 중농 김운식·장수금 부부의 4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활력이 강하고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 4학년때 오직 그의 「학업」을 위해 목포로 이사했다. 소년 김대중은 당시만해도 전국 10대명문중 하나였던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고 졸업후엔 목포상선에 취업, 수완을 발휘했다. 목포상선에 다닐 때 친구의 동생이었던 첫부인에게 줄기차게 구애, 백년가약을 맺었다.<고태성 기자>고태성>
◎고난의 대명사가 위기 해결사로
김대중 당선자는 항상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역정이 고난의 점철인 그의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은 바로 신앙에 기초한 소명의식이다. 하느님이 자신을 죽을 고비때마다 살려준 것은 필요한 일을 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김당선자는 14일 열린 이번 대선의 마지막 TV합동토론회에서 『세번의 도전에 실패했으나 하느님이 이번에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은 나라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일을 맡기시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소명의식의 일단을 밝혔고 결국 이는 현실로 나타났다.
김당선자에게는 항상 납치, 살해기도, 망명, 투옥, 연금 등의 말이 붙어 다닌다. 그는 소명의식으로 이같은 단어를 극복해 냈다. 김당선자는 박정희정권으로부터 시작된 독재정권 아래서 모두 55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했고 6년여의 감옥생활을 했으며 2차례에 걸친 외로운 망명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또 네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고비마다 김당선자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소명의식이었다.
김당선자는 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돼 또다시 사선을 넘게 된다. 괴한들은 도쿄중심의 호텔에서 그를 납치해 토막살해를 하려다 여의치 않자 배에 태워 현해탄에 던져 버리려 했다.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 그는 눈앞에 하느님이 나타나는 영적 체험을 하면서 『나는 아직도 못 다한 일들이 많습니다. 국민들을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있습니다』라며 처음으로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는 주어진 소명을 다할 기회를 달라고 간구했고 기도는 이루어졌다. 김당선자의 소명의식은 이때 보다 확실해 졌다. 김당선자는 국민과 더불어 하는 정치를 소명의식과 연결시키고 있다. 국민을 하늘처럼 받들고 국민과 함께 간다는 것이 바로 그의 소명의식이다. 김당선자는 89년말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차기정권을 전제로 한 합당을 제의받고 『우리가 합당을 한다면 국민의 뜻, 나아가 하늘의 뜻에 거역하는 일이 된다』며 거부했다.<고태성 기자>고태성>
◆김대중 당선자 연보
▲1925.12.3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출생
▲44.3 목포상업학교 졸업, 목포상선회사 입사
▲51.3 흥국해운(주) 사장, 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단장
▲60.10 민주당 대변인
▲61.5 5대 민의원 보궐선거 당선(강원 인제)
▲68.6 신민당 정책위의장
▲70.9 신민당 7대 대통령후보 지명
▲71.4 7대 대선 패배(46% 득표)
▲72.10 신병치료차 방일, 유신선포로 망명생활 시작
▲73.8 기관원 납치·살해기도, 현해탄 수장모면
▲76.3 3·1민주구국선언 주도
▲79.12 10·26사태후 연금해제
▲80.9 계엄군법회의서 사형선고
▲82.12 감형후 형 집행정지, 미국 망명
▲85.2 2·12총선 앞두고 귀국, 총선서 신민당 돌풍
▲87.11 평민당 창당 및 13대 대통령후보 지명
▲90.1 3당 합당
▲91.9 통합야당 민주당 출범
▲92.12 14대 대선 패배, 정계은퇴 선언
▲93.1 영국 케임브리지대 수학
▲94.1 아태평화재단 설립
▲95.9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총재취임
▲97.5 15대 대통령후보 지명획득
▲97.11 야권 후보단일화 및 DJP 연대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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