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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있는 부동층/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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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있는 부동층/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특별기고)

입력
1997.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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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거정치 위기가 막판까지 부동층 양산/변덕아닌 고민의 산물 준엄한 한표 행사를「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학창시절부터 들어온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 말이 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정책 중심의 정치가 펼쳐지고 건강한 시장질서가 구축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화의 시대에 들어선지 오래이지만 한국은 그러한 변화의 시대에 부응할만한 세력을 형성하는데 두번이나 잇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무진년에는 5년동안 남의 눈치만 살피다 말 노태우총재의 손에 대권을 쥐어주었고 계유년에는 넓은 지적시야를 갖추지 못한 채 무턱대고 개혁의 수위를 높일 김영삼 총재에게 청와대를 맡겼다.

이처럼 시대에 맞지 않는 인물이 대통령직에 오르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지난 몇주동안 한국을 강타한 「국제통화기금 한파」는 따지고 보면 구조적 조정의 시기를 수차례 놓치고 경제기적의 잔치만을 벌여온 대통령 두 명의 무능과 무지 및 무책임에서 빚어진 것이다.

다시 선거철이다. 이번에는 시대에 맞는 후보를 제대로 찾아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누구를 찍을까』하는 물음에 부딪히면 상당수가 긴 한숨을 내쉬고 침묵하고 만다. 시대에 걸맞는 영웅은 커녕 비판적 지지를 보낼 만한 후보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년 남짓 지속되어온 대선정국은 선거정치의 이상형에서 크게 벗어난 지 이미 오래이다. 선거 막판까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두터운 부동층은 한국의 선거정치가 직면한 정당성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거에서 정책에 대한 논의는 실종되다시피 한 상황이다. 대신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폭로와 비방이 난무하고 방송매체의 힘을 빌어 막연한 「이미지」로 자신의 단점을 가리고 국민을 설복하는 미디어정치가 막 시험되고 있다. 심지어 경제적 공황에 맞서 중지를 모아야 할 시점에서조차 지키지 못할 약속이나 남발하고 계층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선거에서 몰리면 언제나 동원되는 것이 낡은 지역감정의 정치이다. 일부는 『우리가 남인가』하는 논리로 다시 국민을 현혹시키고 지지기반을 넓히려는가 하면 일부는 『기권층이 많아야 당선이 가능하다』는 냉소적 계산아래 낮은 선거참여를 은근히 기대하기까지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층을 소신없는 변덕쟁이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오히려 폭로전과 비방전에서 불거져 나오는 각 후보진영의 「말」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주어진 현실의 갖가지 딜레마를 고민하는 시민이면 시민일수록 부동층의 대열에 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다.

부동층은 소신없는 「갈대」가 아니다. 오히려 소신이 있기 때문에 누구를 찍을 지를 고민하는 계층이다.

그러나 고민하는 부동층이 무책임한 기권층이 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이자 책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동층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투표장을 찾아야 하는 까닭은 이회창과 김대중 및 이인제 후보 사이에 「작지만 큰」성격상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로 그러한 성격상의 차이에서, 다가올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위기의 전환기이다.

지금 한국은 갈림길에 놓여 있다. 남북한관계는 대화냐 대결이냐 하는 기로에 서있고 경제는 대공황의 위험과 재기의 기회 사이에 놓여 있다. 한국이 어디로 가는가는 결국 정치가 결정할 일이고 차기 5년의 정치는 내일 있을 국민적 선택에서 그 향방이 판가름난다.

부동층은 잠시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공허한 「말」로부터 자신을 차단하고 각 후보의 성품과 스타일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년 초반부터 본격화할 위기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국민을 현혹시키지 않고 신중하게 문제의 핵심에 다가갈 성품의 인물이다. 그러한 적임자가 보이지 않으면 거꾸로 「되어서는 안되는」후보부터 하나씩 걸러내어 남은 자를 선택하는 지혜까지 발휘할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선거는 최상을 선택하기보다 최악을 방지하는 「네거티브 게임」인 것이다. 없는 영웅을 기다리기보다 주어진 범위 내에서 있는 차악을 선택하는 슬기를 보여주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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