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지전투」는 2차대전 말 나치독일의 회심의 반격작전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후퇴를 거듭하던 독일군은 그 해 12월16일 800㎞에 달하는 연합군의 전선중 가장 취약한 아르덴 지역에 최정예 병력을 집결시켜 기습적인 반격을 개시한다. 목표는 벨기에의 앤트워프항. 연합군의 보급로를 끊고 전선을 두동강내기위해서였다. 「발지(bulge:팽창)」라는 이름이 붙여진데서 보듯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연합군은 한 때 공황상태에 빠졌다.올해 7월1일 중국의 홍콩 주권회복은 「서세동점시대」의 종말과 아시아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2월에 아시아시대의 주역을 자부했던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신탁통치」아래서 철저한 서구화를 강요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것은 파리탈환이 파시즘의 조종이라며 느긋해하다 혹독한 독일 맛을 보았던 44년 겨울의 연합군을 연상시킨다.
서방인들은 「아시아시대의 도래」를 경계하는 한편으로 코웃음을 쳤다. 헌팅턴이 이슬람세계과 아시아문명의 대두에 대해 서구문명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면 동아시아 경제발전의 한계와 그 추락을 예고한 크루그만은 동아시아에 대한 서방 일부의 패배주의 시각을 거부한 것이다. 이 들 두학자가 그들의 견해를 밝힌 책은 포린어페어스. 냉전초기 「미래의 물결」을 자부한 「공산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의 기초를 제공한 케넌의 논문이 게재된 바로 그 잡지다. 한국의 비극은 내재한 모순 외에 「NO라고 말하기 시작하는」중국과 일본사이에 「교두보」를 마련해야할 서구의 절박한 필요성을 간파하지 못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바닥난 외환사정을 알리며 도움을 호소했을 때 IMF, 아니 배후의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제로섬 게임」을 벌였다. 한국이 과거의 「냉전 패러다임」에 벗어나지 못한반면 미국은 헌팅톤의 「천하 3분 패러다임」에 따라 한국의 환부는 물론 그들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역동성」마저 도려내려한 것이다.
발지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모순을 극복하는 한편으로 역동성을 지켜낸다면 오늘의 굴욕은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발지전투」에 오늘의 상황을 비유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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