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적 세대개념 뛰어넘는 시적 돌파력과의 만남참신함과 치열함 따위의 문학적 덕목들은 대개 젊은 세대의 시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하나의 통념이지만, 이경림의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창작과 비평사)를 읽어보면 생리적 세대개념을 뛰어넘는 어떤 시적 돌파력을 만나게 된다. 이경림의 시집은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시의 나즈막한 그러나 안으로 끓어오르는 격렬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 시집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건물의 이미지에 관련된 시들이다. 시인은 「담」을 「다만/길이요 높이요 두께인/그저 완강한 아집」이라고 표현하고 그것들이 「불 밝힌 진짜 집들을 가리고 서서/길을 막으며 길을 만드는 저런 괴건물들」이라고 지칭한다. 단절과 억압의 상징으로서 「담」을 노래한 시인은, 저무는 풍경 속의 불 켜진 건물들을 「저 건물들이 피네 세계는 각진 딱딱한 꽃밭이네」라고 비유하고 「저무네/울부짖네/의혹처럼/한줄로 서서」라고 묘사한다. 이런 소외의 상징으로서의 건물들은 급기야 「나」를 깔아 죽인다. 「콘크리트 건물에 깔려 죽은 나 1/철근에 옆구리가 꿰진 나 2」에서 사고를 당한 익명의 「나」들을 표현한 뒤 「지켜보던 나0 지겨운 듯 리모콘을 누른다」라는 묘사를 통해 비극적인 장면들로부터의 극심한 자기소외를 드러낸다.
그러나 건물들은 다만 「나」의 밖에서만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내 속에 궁전 하나 있네」라고 호화스런 욕망의 내부를 말하고 그 밑에는 「미로들이 무섭게 뒤엉킨 거대한 감옥」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네가 마지막으로 짓고 들어앉은 그 건물」은 「완벽한 자폐의/완전 개방」의 「무덤」이다. 건물의 상상력이 소외와 고독의 상징으로부터 문득 해방되는 것은 「저 나무는 허공이 집이다」라고 전제한 뒤 「고물거리는 것들을 에워싸고 같이 고물거리는/물컹한 건물들」을 노래할 때이다. 실존의 감옥으로서의 건물은 이제는 생명과 생명이 겹겹이 맞닿은 살아 있는 공간이 된다. 우리는 「보이지않는 것들 속에 꼭 제 몸만한 홈을 파고」있는 저 「어른거리는 건물」에서 살고 싶다.<문학평론가·서울예전 교수>문학평론가·서울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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