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에도 세계금융체제에 약한 고리는 있게 마련이다. 94년말과 95년초 이 약한 고리는 멕시코였다. …언제 어디에 금융위기가 닥칠지 얼마나 큰 위기가 몰려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런 위기가 올 것이라는 점만 전적으로 확실할 뿐이다』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우는 지난해 출간한 저서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불안정성을 이렇게 말했다.이 책에서는 멕시코 위기때 나온 「멕시코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한 경제잡지의 기사도 소개되었는데 거기에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브라질 말레이시아 태국 아르헨티나 칠레 등 일곱나라가 거명되었다. 한국이 올라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안도했던 기억이 새삼 허망하다. 97년말에, 그 「약한 고리」가 한국일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IMF위기체제에 들어서면서 경제 실정문책론이 들끓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정축오적」을 들먹이고 있고, 시민단체들은 경제파탄책임자 처벌을 외치고 있다. PC통신에서는 「12·3국치 원흉 10적」의 처단까지 주장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하루하루 힘들지만 성실히 살아온 보통사람들의 이런 울분은 당연하다. 매일같이 대기업 부도소식이 전해지면서 무엇보다도 대량실업사태가 예고되고 있다. 시민들의 불안감이 분노로 변해 폭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한편으로 검찰이 경제실정 책임자 처벌문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눈길을 끈다. 경제위기에 대해 누구든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여론인 만큼 전·현직 고위경제관료를 비롯해 법적으로 책임질 사람이 있는지 광범위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정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시민들의 외침을 이해하면서도, 그러나 검찰의 이런 반응에는 한가닥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정책의 잘못에 대해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처벌근거로 「직무유기죄」가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고의적인 직무포기가 아닌한 과실에 대해 직무유기로 처벌할 수는 없다.
경제실정 책임자들의 수뢰혐의 등 개인비리 내사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특정기업과의 불법 유착관계가 있었다면 처벌받아 마땅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구체적 피의사실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마치 범죄인 취급을 한다면 이는 여론을 앞세운 인권침해요, 법의 오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정책임 문제를 그냥 덮고 가자는 것인가. 결코 그것은 아니다. 금융위기가 언제 어느나라에 들이닥칠지 누구도 모른다는 서로우의 말을 인용한 것도 결코 경제관료들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음은 변명할 수 없는 대실책이다. 재정경제원은 지난달 배포한 책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남아같은 외환위기는 없다』 IMF구제금융신청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니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이제 한국경제관료의 신화는 산산이 깨졌다. 경제개발계획 시작후 30여년의 최대 정책실패에 대해 그 경위를 규명하고 책임소재를 밝히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만이 아니다. 또다시 이같은 대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진상조사는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다. IMF위기체제 극복을 위해서는 모든 경제주체들의 고통감내가 불가피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과정이 마련되어야 한다. 책임규명절차가 화풀이로 끝나서는 안되겠지만 심리적 치유과정 없이 국민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정부는 스스로 진상을 조사하여 그 결과를 국민 앞에 밝혀야 한다. 이를 토대로 국회가 국정조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정조사과정에서는 시민단체들의 요구사항이 광범위하게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경제난국에 대한 「모두의 책임론」이 실정책임자들에 대한 정치적, 행정적 면책구실까지 될 수는 없다. 동시에 실정책임자 문책론이 정치권, 기업, 소비자 모두의 책임을 덮어서도 안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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