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에 대한 정치권의 논란이 춤을 추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다투어 금융실명제 유보를 주장하고, 대선전에 국회를 열어 대체입법을 하겠다고 서두르고 있다. 지난 7월 임시국회에서 정부가 제출한 실명제 대체입법안을 의견차이로 유보시켰던 정당들이 불과 다섯달만에 돌변하여 벼락치기로 입법을 하겠다고 합창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그들은 오늘의 경제파탄을 가져온 큰 이유가 금융실명제라고 주장하고, 장롱에 숨어있는 막대한 돈을 산업자금화하려면 실명제 유보내지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경제전문가들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복합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국제수지 악화, 대외지급 능력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불안, 정부의 무능, 금융기관의 부실, 기업들의 무모한 투자 등이 오늘의 외환위기를 불렀다는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돈의 흐름을 왜곡시켜 기업들의 자금난을 심화시키고, 부유층의 과소비를 촉진시킨 측면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위기의 본질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지금 만병의 근원으로 지탄받는 실명제는 경제정의와 깨끗한 정치를 가져다줄 만병통치약으로 국민의 머리에 깊이 각인돼 왔다. 여야가 입을 모아 실명제 시행을 주장하고 화려한 수사로 효과를 선전해 왔기 때문이다.
13대 대선에서 금융실명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취임후 실명제를 추진하다가 중단했는데, 당시 실무작업을 진행했던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은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 도입등을 혁명적인 조치라고 할 수는 없으나 혁명을 막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치』라고 역설하고, 『경제부문에서 정의구현이 이루어지면 정치도 자연히 함께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시 조순 경제부총리는 『91년까지 금융실명제가 시행되면 기업이든 개인이든 자산소득이 다 노출되어 전반적인 경제운용의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이며 경제정의 실천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일 TV토론에서도 본인들이 시인했듯이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도 금융실명제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이회창 후보는 감사원장이던 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실명제 조기실시를 건의했고, 지난 8월 『실명제는 도입당시 사회정의와 형평성 등 개혁쪽에 무게가 실림으로써 경제효율성을 간과한 측면이 있으므로 보완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혔다. 김대중 후보는 92년 대선에 입후보하면서 93년까지 금융실명제를 시행하겠다고 공약했고, 국민회의는 지난 7월 임시국회에서 실명미확인 지하자금을 산업자금화할 때 출처조사를 면제하자는 여당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93년 8월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발표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선언했던 경제정의 실천약속은 혁명공약처럼 추상같았으며, 국민으로 하여금 이 땅에 다시는 검은 돈이 발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갖게 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이 드러나고, 다시 현직대통령 아들까지 비자금이 드러나 감옥에 가게 됐을 때 실명제의 위력은 절정에 달했다.
금융실명제의 부작용에 대한 불평이 많다고 해서 실명제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제와서 실명제의 팔 다리를 다 잘라서 사실상 폐기처분하고, 역사를 뒤로 돌리겠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부작용에 대한 검토도 없이 실명제를 찬성했던 사람들, 실명제가 징벌위주로 가는 것을 한번도 경고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선거에 쫓기며 대체입법을 서두르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다.
김영삼정부의 개혁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그 개혁에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까지 조롱당할 수는 없다. 김대통령의 무능과 실책이 아무리 크다해도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는 안된다. 김영삼 때리기로 한없이 재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아직 실명전환을 안한 은행 예금이 3조3,000억원, 지하자금 추정액이 20조원, 장롱에 들어있는 돈이 1조원으로 추정되는데, 이 막대한 검은 돈에 결국 실명제가 손을 들 수 밖에 없다는 말인가.
실명제는 정치적으로 운용됨으로써 부작용이 커졌다. 경제정책을 정치에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이 마당에 다시 대선후보들은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다. 대체입법이 꼭 필요하다면 대선후에 표를 의식하지 말고 해야 한다. 두주일도 못 참겠다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짓이 아닌가.<편집위원>편집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