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만이 내 영화의 힘”/꿈과 환상이 아닌 사회 비추는 거울로 영화를 자리매김카메라가 담을 수 있는 진실이란 과연 어디까지인가. 대만 감독 차이밍량(채명량·38)에게 영화는 이런 탐구의 길이다. 카메라는 수많은 현실 중 일부를 선택하고, 나름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대상은 영원히 대상으로 머물며 화면 속에는 선택된 현실만이 있다. 차이밍량은 카메라가 잡을 수 있는 최대의 진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진실의 눈으로 잡아낸 대만의 오늘 사회는 우울하고 비관적이다.
데뷔작 「청년 나타」(92)와 「애정만세」(94)에 나오는 젊은이들은 모두 힘겹게 살아간다. 연인들은 쉽게 헤어지고,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침대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외롭다. 단절된 관계 속의 인간들은 소외의 극단에 서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다.
그는 「우리 삶에 희망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모두 돈은 많이 벌었다. 그러나 진정 우리는 자손에게 물려줄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가. 발전만을 위해 경쟁할 뿐 아닌가. 이런 사회에 어떤 낙관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진가는 누구나 떠올릴 법한 그런 메시지를 포착했다는데 있지 않다. 「진실만이 내 영화의 힘」이라고 믿는 그는 관객에게 그 힘을 전달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잘라내 버린다. 심지어 『음악은 나의 영화를 파괴시킨다』는 믿음으로 사운드 트랙과 대사를 생략한다. 이런 과감한 스타일의 실험이 그의 영화를 빛나게 한다.
최근작 「하류」(96)에서 그는 모든 곁가지를 발라내고 극단의 메시지와 실험으로 한걸음 더 나간다. 주인공 가족은 단 한번도 같은 밥상에서 식사하지 않으며, 각각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서로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진실로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은 게이 사우나에서 충격적인 만남 이후이다. 20여분에 가까운 지루한 롱 테이크 화면 속에서 오늘을 파헤치는 현미경 같은 그의 시선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차이밍량은 호우샤오시엔(후효현), 양더창(양덕창) 등의 대만 뉴웨이브(신랑조)를 계승하는 90년대 최고의 후계자이다. 선배들은 구경거리가 아닌 삶으로서의 전통과 문화를 작품에 담았다. 영화가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사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전통은 90년대 들어 농촌에서 도시로 배경화면을 바꾸었지만, 오늘날 우리의 기쁨과 슬픔, 그 속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는 진정성은 일관해서 흐른다. 그 흐름 속에 있는 차이밍량의 영화는 「영화같은 세상」을 보여주는 꿈과 환상의 공간이 아니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나 차이밍량 자신도 『진실이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영원히 진실 그 자체를 이야기할 수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한없이 진실에 가까워질 것임은 분명하다.<이윤정 기자>이윤정>
◎대만 뉴웨이브의 원류 호우샤오시엔/시적 리얼리즘의 현인
왜 호우샤오시엔(후효현)인가. 에드워드양과 차이밍량으로 어깨를 겯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수맥을 굳이 호우샤오시엔에서 찾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문은 그의 영화를 다시 보는 순간 스러진다. 보라. 시골 작은 읍, 그 먼곳까지 느리게 스며들어 생을 포위하는 역사, 연인과의 별리, 싸움, 사투리, 칼부림, 폐허. 그럼에도 어김없이 아침은 오고, 그러면 다시 또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가족, 세상과 질기게 길항하는 가족의 삶, 이를 지켜보는 시선. 그의 영화를 채우는 무수한 조직들이다. 이 가운데 변함없이 흐르는 어떤 느낌에 난 주목한다. 스멀스멀 흘러 관객의 가슴을 흠뻑 적시는, 이를테면 긴 침묵, 대기를 누르는 한없는 적요, 대칭의 공간이 마련한 소리 없는 시간.
2·28항쟁이라는 대만 역사의 질곡(비정성시)이나 현대의 우울한 가족근황(희몽인생, 동동의 여름방학)을 보고하는 그의 목소리는 톤이 낮다. 조용하다. 말을 아낄 줄 안다. 세월을 침묵으로 다스릴 줄 안다. 그 침묵은 야만의 역사를 그들이 어떻게 견뎌왔는지 보여주는 역설의 도구다. 증거다. 그것은 단순한 적막함에 머물지 않는다. 내면의 요동을 간직한 침묵, 호우샤오시엔 영화의 침묵엔 내밀한 비명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비유컨데 롱테이크는 적요하다. 「비정성시」에서 카메라는 둔덕 위에 있다. 집 밖으로 뛰쳐나온 누군가 칼을 들고 쫓아가면 카메라는 슬쩍 더 뒤로 빠진다. 마을은 저 아래로 부감된다. 아, 이렇게 살아있구나. 느끼게 된다. 이때 사건과 물상을 뚫어지게 잡는 고정 쇼트는 독하다. 악이라도 내지를 것 같이 산채로 멈춘 시선의 응고! 얼어붙은 프레임 안에서 벙어리는 말을 하고, 스틸 카메라는 움직이는 절망의 사연을 천천히 감각하게 해준다. 무릇 예술가란 이런 존재다. 순진한 마음과 노련한 손길이 깃든 「동동의 여름방학」은 사랑스럽다. 그는 여기서 희미한 기억의 시간을 비추어준다. 그러나 횃불을 들이대는 대신 조그만 초 한 자루만으로 시간의 음영을 떠올림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를 두고 시적 리얼리즘이라 부르면 너무 헤픈가?
시에 부딪힌 리얼리티, 필름 표면 위에 난반사하면, 그 빛의 파장, 기어이 차이밍량의 「하류」에 가 닿는다. 그러니 어찌 호우샤오시엔이 아닐것인가.<김정룡 영화평론가>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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