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제도속에서 마모된 성과/황혼녘에 되찾는 사랑의 성 대비사랑과 결혼은 상극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로맨스의 걸작들은 결혼의 성공에서 이야기를 끝내거나 아니면 유독 혼외의 사랑을 다루겠는가. 사랑과 결혼의 모순은 소설의 인간학이 줄기차게 가르쳐 온 세속의 진실 가운데 하나이다. 사랑이란 정열의 표현이 궁극적으로 모든 삶의 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결혼은 바로 그 제도 속에서 남녀의 관계를 규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한 남녀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것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박완서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문학동네」 겨울호)을 흥미롭게 읽을 것이다.
이 단편에는 오랫동안 남편과 별거를 해 왔고, 자식을 모두 성가시킨 여성이 초점화자로 등장한다. 별거와 연륜이란 조건은 여성화자에게 남편을 관찰하는 유리한 거리를 만들어주고, 부부관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가능케 한다. 그녀는 교장직에서 물러나 홀로 시골에서 살고 있는 남편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인간인가를 낱낱이 일러준다. 남편의 촌스러운 모습에는 가부장의 역할을 내면화한 남성의 초라한 실체가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 젠더 비판은 남편만이 아니라 여성화자 자신에게로도 향한다. 그녀는 사돈에게 아들을 빼앗겼음을 직감한 순간 「허방」을 밟은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아들에게 집착하고 있었던 그녀 자신의 초라함을 깨닫는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러브호텔에 들어 서로 단절된 몸을 후회하는 장면에는 결혼이란 젠더의 제도 속에 시들어버린 성에 대한 비범한 통찰이 있다.
성의 분업에 순치되어 살다가 「거대한 허전함」과 마주쳐 늙은 몸으로 다시 만난 부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그들 서로에게 비친 각자의 모습이며, 그들의 한스러운 교신의 부호이다. 박완서는 연령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제도에 의해서도 마모되는 슬픈 성을 기막히게 그려냈다. 여성화자가 고가구를 어루만지듯이 남편의 몸을 어루만지는 행동을 뭐라 불러야 할까. 말이 궁해서가 아니라 말의 바른 정의를 위해서 그것은 사랑이라 불러 마땅하리라.<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문학평론가·동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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