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나옹·사명 등 큰스님이 거쳐간 곳/19세기말 대화재이후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무색·무미·무취 예천이 지난달 우연히 발견금강산 건봉사에 경사가 났다. 『하늘 새, 봉황이 날아 온다는 이 절에 봉황이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하늘샘이 솟았는 거라요』 모두가 밝은 얼굴이다. 오래전 땅속에 묻혀 버린 건봉사의 자랑, 옛 전적에 「예천」이라고 적혀있는 「하늘샘」의 물줄기를 7m 땅아래서 발견한 것이다. 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금강산 남쪽 끝자락에 자리잡은 건봉사 하늘샘은 예전부터 명수로 이름나 있었다. 냉천리라는 지명에서 볼 수 있듯 이곳 냉천탕은 여인네들 피부병에 특효로 알려졌고 냉천막걸리 또한 유명하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 될 당시는 이름이 원각사였다. 신라말 도선국사(827∼898)가 무슨 이유에선지 서봉사로 바꾸더니 고려말 나옹스님(1320∼1376)이 지금의 건봉사로 또 바꾸었다.
건봉사 하늘샘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선, 나옹, 서산(1520∼1604), 사명(1544∼1610), 만해(1879∼1944)와 같은 고승이 절에 머무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명대사가 앞에 있는 백화암으로 전국 의병을 모아 왜군을 쳐부신 후에는 「장군샘」으로도 불려졌다. 조선 고종 15년(1878년) 3,180칸의 대가람이 불타면서 이 샘도 땅속으로 묻혀 버렸다.
「봉은 물의 정기를 받아 생겨나는 신조이자 상서러울 때 응감하는 서응조」로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비죽실불식), 솟아 오르는 단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비례천불음)」는 강희자전(강희자전)의 기록으로 봐 「봉」자가 붙은 절은 이 「하늘 새」를 맞이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일주문을 지난 왼쪽 언덕에 세운 돌솟대위에 봉황을 조각해 두었다. 절의 어른이 주석하는 백화암 북쪽에는 봉의 먹이인 대나무 숲, 그 아래에는 봉이 마실 「예천」까지 만들어 둔 것이다.
불이 나기 전만 해도 3,180칸에 부속 암자 15개, 신흥사 백담사 낙산사 수타사 등을 말사로 거느린 국내 4대본사중 첫번째 가람이었다. 또한 15과 뿐으로 알려진 부처의 치아사리 12과가 봉안되어있다. 삼국사기는 이 사리는 자장율사가 636년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가사와 함께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사리는 통도사에 봉안되었으나 임진란 때 왜군이 탈취해 간 것을 사명대사가 찾아와 건봉사에 봉안케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치아사리는 86년 7월 도굴되었다가 다시 발견되는 바람에 그동안 전해진 이야기가 사실임이 확인됐다.
「걷고 걷고 또 걸어서/ 층층한 벼랑 몇 겹이더냐. 구렁에 흰 구름 일어나 향로봉을 문득 잃었구나. 시냇물 길어 낙엽 태워 차를 달여 마시고…….」
「……시내의 달 길어다 차를 달일제 푸른 연기 나네. 날마다 무슨 일 의논하나/ 염불과 참선 뿐이라네」
시냇물에서 달을 길어다 차를 달이는 서산대사, 범인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그 경지를 한번 흉내내본다. 시 속의 향로봉이 바로 건봉사가 있는 곳이다.
서산대사는 선조로부터 「팔도선교도총섭 겸 의병대장」의 소임을 받고 팔도에 격문을 날린다. 격문이 돌자 평안 경기 황해도 의병은 묘향산 서산의 휘하로, 강원 함경도는 건봉사 사명대사에게 모인다. 건봉사에 모인 승병은 700여명. 승병들의 훈련본부가 이번에 발굴된 하늘샘옆의 백화암터 였다.
간성에서 서쪽 향로봉쪽을 보고 산골짝으로 들어선다. 건봉사 가는 길 안내판을 따라 산 하나를 넘으면 일반의 출입이 통제된 민통선구역. 황토색 기둥같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원시림이나 다름없다. 민통선 안이지만 건봉사 가는 길만 89년 풀렸다. 들머리 비석거리에 즐비한 80여기의 부도와 비석이 건봉사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모두 부서지고 불이문만 남았었다. 2년전 부터 해장스님이 주지를 맡아 대대적인 불사를 벌이고 있다지만 아직도 넓은 절터는 허허롭기 그지 없다.
지난달 중순 굴삭기로 대웅전 동쪽 옛 백화암터를 고르던 스님이 북쪽 대밭 아래가 질펀한 것을 보고 파보기 시작했다. 파들어 갈수록 흙색깔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오래전 이곳에 있던 건물이 불에 타면서 주변의 토사가 밀려 파묻혀 버린 것으로 보였다. 7m가량을 파내자 암반이 나왔다. 여근 모양의 작은 음석사이로 맑은 석간수가 졸졸 흘러내렸다. 수질검사를 했다. 냄새 맛 색도 탁도와 암모니아성 및 질산성 질소함량이 기준치 이상이었다. 대장균 일반세균 잔류염소가 전혀 없는 최상의 수질이었다. 『기적같은 일입니다. 신라말 도선국사, 고려말 차의 달인이었던 나옹스님이 봉자를 절이름에 붙인 이유를 짐작할 것 같습니다』 해장스님은 또 『바로 대나무 숲아래에서 이런 샘이 발견됐으니 강희자전의 예천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기뻐했다.
땅속 암반의 작은 구멍에서 봉긋봉긋 솟아 오르는 물을 떠 맛을 보았다. 그렇게 차지도 않고 마시기 알맞은 온도였다. 단맛이 약간 도는, 무색 무미 무취한 그야말로 보기드문 석간수였다.<김대성 편집위원>김대성>
◎차입문/차의 참맛 즐기려면 차관·찻잔 크기대로 물의 양 잘 조절해야
찻잔과 차관의 어울림은 무척 중요하다. 차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 작은 호박만한 차관에다 2,3명이 차를 마신다고 물을 반도 못 채우고 차를 우려 내었다. 자칫 물을 많이 부으면 차관에 물을 다 따르지 못하여 차가 계속 우러나 두번째는 쓴 차를 마시게 된다.
차를 맛있게 내는 요령 중에 하나가 차관의 크기와 찻잔 크기를 잘 짐작하여 물의 양을 조절하는데 있다. 차를 우렸으면, 찻잔에 모두 따르거나 나누어 마실 수 있는 그릇에 모두 따르도록 한다. 물을 식히기 위한 귓때 사발을 쓰고 있으면, 좀 더 고른 차맛을 즐길 수 있다. 이런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1인용, 부부용, 3인용 차관 그리고 5인용 차관을 구분하여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홀수로 찻잔을 준비하지만 중국은 짝수다. 가장 일반적인 차그릇이 우리는 5인용인데 비해 중국은 6인용이 기준이다.
1인용 차관은 찌꺼기를 거르는 용수처럼 생긴 망을 찻잔안에 넣어서 찻잎을 걸러 마시도록 고안된 것인데 8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독창적인 것이다.
차가 적당히 우러나면 차거름망을 들어내 뚜껑에 올려 놓으면 된다. 너무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찻잔을 잡기 어렵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다.
대만 사람들은 찻잔 둘레에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만든 싸개를 입히거나 손잡이를 달아서 동심배라는 멋진 이름을 부쳐 사용하고 있다. 동심배는 하나가 되는 찻잔이란 뜻이다. 마음 번거로운 날, 그릇을 다 갖추지 못하면 1인용 차관으로 차를 마시면서 나를 다시 돌아보며 호흡을 고르며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 참다운 차생활이 아닐까 한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박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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