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이기로 한 정부결정의 충격이 큰 것은 국내만이 아니다. 웬만해서는 큰 헤드라인을 뽑지 않는 뉴욕타임스 조차 전지면을 가로지르는 대문자로 「20세기 후반 가장 빛나는 경제성공담의 하나였던 나라에서의 놀라운 대전환」이라고 보도하면서 이번 사태를 세계사적 대사건으로 다루고 있다.최근 모든 신문에서는 사태에 관한 여러 가지 진단과 전망이 나오고 처방이 제시되고 있다. 국제외환부도에 따른 금융체계는 파산이지만 수출성장, 물가 등 거시지표들은 아직 파산지경이 아니며 이 위기를 계기로 우리는 외압을 빌려서라도 구조개혁을 단행하여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된다는 자위 겸 결의를 다짐하기도 한다. 외압의 힘을 빌려서 지금부터라도 고도성장의 거품을 빼고 안정성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옳은 얘기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지금까지 모든 중요사태에 대한 대응이 그러했듯이,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정책결정의 중심에 있는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대응하는 자세를 보면서 커다란 불안감과 회의를 떨쳐버릴수 없다. 우리는 정부당국자들이 이번 사태의 본질에 관하여 과연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용의를 갖고 있었는지, 위기를 극복할 실천적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인지, 언론은 사태를 정확하게 보도하려 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지난 한 달 이상동안 외국의 주요신문들은 한국경제의 위기가 목전에 당도했음을 냉정하게 보도해왔다. 이에대해 정부당국자들과 언론은 이를 우리경제에 대한 음해로 규정하면서 강경한 대응자세를 보였다. 정책결정자들이 올바른 국정운영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문제의 본질을 은폐, 왜곡하면서 국민을 오도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언론도 이에 편승해왔다.
한보철강부도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지난 대선과 관련된 부패한 정경유착이 오늘의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미 위기의 징후가 구체화한 7월에 시작된 기아사태는 석달이 지난 10월에 가서야 겨우 일단락되었다. 이 엄청난 사태에 대해서 정부도 집권여당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지도자들이 원칙과 비전을 가지고 국가명운이 걸린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적도 없다. 한걸음 더나아가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은 그와는 무관하다고 선언하고, 대통령의 퇴임은 얼마 남지도 않았다.
이 정부는 누가 움직여왔고 책임은 누가 지는가. 이는 그동안 우리국민은 아무도 아닌 사람에 의해 통치됐다는 말밖에 안된다. 거덜난 나라의 모습이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지(24일자)는, 청와대와 재벌이 한결같이 경제적 이상을 1960년대 독재의 경험에서 찾는 경제발전관과 정부재벌유착이 주도해온 고도성장이 사태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규제, 재벌특혜, 그리고 그에 힘입어 세계최고의 은행부채율을 갖는 30대 재벌이 전체 국부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는 끊임없는 재벌팽창이 그 주역이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의 이러한 국가부도사태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앞에 들이닥친 것은 아니다. 그동안 학계에서 그리고 양식있는 식자들이 입이 닳도록 말해온 것을 실천하지 않아서 발생한 예정된 재앙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개발독재하에서 구축된 정부지원하의 재벌중심의 물량적 성장단계가 종결되고 민주정치에 걸맞는 균형있는 질적 경제발전으로의 전환이 강제되는 시점이다. 이 전환을 성공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새로운 리더십, 국민화합이 필수적 요건이다. 고통과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구조변환과정에서 국가목표에 대한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순응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의 위기는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가 그 중심에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지도자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지역감정과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다. 시대적 과제를 저버린 망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97년 대선을 국가적 난국타개를 위한 대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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