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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학계 새 화두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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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학계 새 화두로 떠오른다

입력
1997.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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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에서 미술·건축까지 서구이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전통을 체계적 재해석/보편적 대안이론을 제시한다「동아시아적 시각」이 학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미술 건축 음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전통을 체계적으로 재해석해 보편이론을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각 분야에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흐름을 짚어본다.<편집자 주>

지난 6월 사회과학 계간지 「전통과 현대」 창간호가 나온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학술잡지로는 드물게 재판까지 찍으면서 5,000부가 팔려나간 것이다. 대형서점 직원들도 『신기한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놀라운 점은 판매부수만이 아니다. 이 잡지 편집진의 면면을 보면 주간을 맡고 있는 함재봉(39) 연세대 정외과 교수를 비롯해 대부분이 미국과 독일 등에서 유학한 젊은 사회과학자들이다. 말하자면 현란한 서구 최신이론의 세례를 받을 대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내세운 표제는 의외로 「전통과 현대」였다. 『그동안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데 실패한 서구이론을 극복하고 전통과 현대의 균형잡힌 시각으로 좌표 잃은 우리 사상계에 이정표를 세우겠다』는 것이 취지. 특히 창간호 특집으로 던진 화두가 「유교와 21세기 한국」이었다. 서구의 좌우파 이론들을 팔 만큼 파본 젊은 해외유학파들이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새삼 공자왈 맹자왈의 「유교」로 눈을 돌린 것이다. 이 잡지에 대해 기존 학계는 아직 반론제기 등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80년대 좌파이론에 탐닉했던 운동권 출신들에게는 오히려 열띤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잡지의 성공은 프랑스현대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풍미하는 우리 사상·문화계의 이면에서 동아시아 문명권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새로운 흐름이 싹트고 있는 증거로 읽힌다. 이 흐름은 소련과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져내림으로써 우파도 좌파도 어디 한 구석 기댈 데가 없어진 듯한 정신과 이론의 공백 속에서 아직은 단편적이지만 바야흐로 하나의 도도한 물결로 용솟음칠 준비를 하고 있다.

인문과학계에도 그런 흐름이 감지된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95년 12월부터 내기 시작한 동양학술총서는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을 새로운 화두로 붙잡았다. 이 총서는 동양그룹 서남재단이 인하대 국문과 최원식 교수, 고려대 행정학과 정문길 교수, 연세대 사학과 백영서 교수, 충북대 중문과 전형준 교수 등을 편집위원으로 위촉, 기획하고 연구·출판비를 지원하는 형태로 발행되고 있다. 1권이 「동아시아, 문제와 시각」, 2권이 「동아시아의 전통과 변용」, 최근 나온 3권이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이다. 앞으로 「동아시아의 산업화와 민주화」, 「중국 근대와 사회진화론」 등이 계속 나올 예정이다.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을 쓴 서울대 국문과 조동일 교수는 동아시아 서사시에 주목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근거를 둔 서사시 개념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제히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계문학사 이해를 그릇되게 만드는 억지입니다. 유럽의 서사시를 일차적인 논거로 하지 말고 다른 여러 곳의 자료를 고찰해 정립한 이론을 적용해야 유럽문명권 중심주의의 선입견을 청산할 수 있습니다. 그 출발은 우리와 가까운 동아시아지요』

동문선이 발행하는 「완역역주 한전대계」 시리즈도 동아시아 고대전통의 기초를 형성한 중국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이다.

솔 출판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의 전통을 올바로 이해하자는 취지에서 12월부터 「중국총서」를 발행한다. 중국의 산렌(삼련)서점,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와 공동으로 정평있는 중국 관련 연구서와 원전을 번역출간하는 일을 우선 시작한다. 임양묵 사장은 『서구사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도 우리 것과 동아시아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며 『총서 발간은 동아시아 문명권 연구를 체계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흐름은 미술사 분야에서도 이미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미술학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잡지 「미술사논단」 제5호는 별책으로 선사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회화사를 추적한 「동아시아 회화사연표」를 내놓았다. 이 잡지는 95년 창간호부터 중국 일본 대만 등 외국학자들까지 동원, 동아시아 미술을 새롭게 조명해오고 있다. 그 이유를 홍선표 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을 아울러 고찰하면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나올 것입니다. 동아시아에 공통된 점으로 서양의 미술과 비교해보면 인류미술전통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지요. 동아시아적 시각의 회복은 각국 미술사의 실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동아시아 미술의 보편사 구성은 물론, 세계미술사의 균형된 인식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업입니다』

14, 15일 한양대에서 열리는 「동아세아 음식문화」 국제학술대회도 동아시아적 시각이 다양한 분야로 넓어져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한국민족학회, 한국일보와 공동으로 이 대회를 주최하는 한양대 민족학연구소 이희수 소장은 이번 세미나를 『한국음식에 영향을 끼친 주변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 음식문화의 참 모습과 특성,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각 분야에서 흘러나오는 동아시아적 시각이 한 데 모여 큰 강이 될 날이 올 것같다.<이광일 기자>

◎인터뷰/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 경제발전·좌파몰락따른 대안찾기 등이 이유”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42) 교수는 지난 6월 계간 「전통과 현대」 여름창간호에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유교자본주의 개념으로 분석한 「유교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발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발전사회학을 전공한 그를 만나 최근 여러 분야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을 새롭게 조명하는 움직임이 형성되는 이유를 들어봤다.

―동아시아가 관심을 끈 건 물론 오래되었습니다만 요즘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뭐로 보시는지요.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발전이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서구에서도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의 성장을 처음에는 일시적인 것이려니 하다가 30년 이상 계속되자 「이거, 뭐가 있는 거 아냐」는 식으로 다시 보게 됐지요. 근년 들어 하버드대 뚜웨이밍 교수가 유교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해 관심을 끄는 등 서구에서 먼저 동아시아의 전통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즈음 외국에 유학하던 학자들이 서양이론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데 한계를 느꼈고 그런 차원에서 관심을 갖게 됐다고 봐야지요』

―좌파몰락과도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냉전시대 좌우의 대립은 치열한 경쟁이었고 학자들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상당히 자유롭게 된 셈이지요. 이론적, 실천적 대안으로서 좌파모델이 지워지면서 새 대안의 가능성으로 동아시아적 전통에 관심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것, 우리에 가까운 것을 강조하다 보면 보편성에서 멀어질 수 있는데….

『물론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식이어서는 안되지요.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는 식은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유교와 유교적 사회질서, 가치관을 연구한다고 할 때 거기서 서양인에게도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차원으로 체계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봐라, 이게 얼마나 보편적으로 타당하냐, 너희들도 이렇게 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합니다. 단순히 서양이론은 한계가 있다는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면서 치고 나가는 수준이 돼야지요』

―동양학 연구는 오랜 전통이 있는데 최근 흐름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고려 얘기는 고려 얘기고 하는 식으로 전통은 전통대로 굴러가고 현대는 현대대로 따로 놀아서는 안됩니다. 물론 옛 전통과 현대의 흐름은 다름니다. 그러나 과거가 있음으로 해서 현재가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현재와 과거를 연결짓는 작업을 해야만 보편이론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이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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