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아야 면장한다지만/전상국 강원대 교수·소설가(아침을 열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알아야 면장한다지만/전상국 강원대 교수·소설가(아침을 열며)

입력
1997.11.12 00:00
0 0

「안다니 똥파리」. 이것저것 모든 것을 잘 아는 체하는 사람을 비웃는 말이다. 나만하더라도 무엇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 뽐내다 그런 비웃음거리가 된 경우가 어디 한두번이겠는가.며칠 전 일이다. 시골 어느 골짜기 입구에서 간밤에 내린 서리로 잎이 폭삭 처져 내린 고추밭을 보았다. 그러나 그 골짜기 위쪽의 고추밭은 서리가 내리지 않아 말짱했다. 서리가 높은데서부터 내리는 건데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고추를 따고 있는 아주머니한테 내가 말을 걸었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듯 물드는 단풍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서리는 낮은데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며 내린다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같은 골짜기라도 서리가 내리는 곳이 있고 안 내리는 곳이 있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어디 그 뿐인가. 그날 나는 고추밭에 왕겨를 뿌려놓으면 서리가 내리지 않는다든가, 서리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고추를 미리 뽑아놓는 방법도 있다는 것도 그 아주머니를 통해 알게 됐다.

들꽃에 미친 뒤부터 나는 산행에 나설 때마다 입이 근지러웠다. 그냥 바라보는 것보다 그 이름을 알고 났을 때의 들꽃이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일행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충동때문인 것이다. 그날도 나는 산국이며 쑥부쟁이, 개미취, 구절초 등 흔히 들국화라고 불리는 가을 들꽃이름들을 일행에게 심어주기 위해 꽤나 설쳐대고 있었다. 이쯤되면 일행들은 눈에 띄는 모든 들꽃이름을 나한테 물어오기 마련이다. 그 중에는 초면인 들꽃도 더러있고 이름을 까맣게 잊은 것도 여럿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나는 그 들꽃이름을 어림짐작으로 적당히 일러준다. 그러나 산행을 끝내고 돌아올 때 일행중 한사람이 조금 전 내가 그 이름을 모싯대라고 엄벙뗑 일러준 들꽃 한송이를 내앞에 수줍게 내밀었다. 이거 혹시 톱잔대가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니 그것은 한국 특산식물인 톱잔대였다. 나는 그 나직한 목소리의 얼굴을 맞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지난해 어느 교육신문에 칼럼을 네번인가 쓴 적이 있었다. 그 글이 발표된 며칠 뒤 나는 두툼한 편지 한통을 받았다. 국어순화운동에 앞장서고 계신 이수열님이 내가 쓴 글에서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지적해 빨간 볼펜으로 바로잡은 것이었다. 그분이 지적해 바로잡은 것이 대부분 옳았다. 그분은 『글을 극도로 치졸하게 쓰는 사람들은 교육학 교수들, 국어국문학, 평론을 포함한 인문계학과 교수들, 그리고 베스트셀러 소설작가들』이라는 지적도 곁들이고 있었다. 『반세기에 걸쳐 이런 사람들이 쓴 글을 교과서에 실어 국어교육을 해온 덕분에, 대학교수 중에서 글을 제대로 글답게 쓰는 사람 찾아보기가 10년마른 땅에서 콩싹보기보다 어렵게 됐다』는 내용과 함께 그분은 내가 쓴 칼럼 네편을 모두 교정해 보내왔던 것이다. 명색이 국문학과 교수요, 책을 열권 넘게 낸 작가로서 나는 진정으로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지면을 통해 그 분의 남다른 국어사랑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치 위에 치있다. 스스로 뽐내는 사람을 경계하여 이르는 이 말이 새삼스럽다. 옛날과 달리 우리는 지금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 앎과 모름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산다. 특히 요즘의 정치판 돌아가는 일이나 교육문제, 경제의 심각성 등에 대해서는 노래방을 통한 전국민의 가수화만큼이나 그 식견이 평준화해 나름의 일가견을 펼쳐낸다.

다시 대통령후보들의 TV토론이 시작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벌이는 집요한 질문에 후보들은 달변으로 종횡무진 그 앎을 과시하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듯 오늘도 그들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다 알아야 한다는 투로 너무나 지당한 말씀, 곧 녹아버릴 사탕같은 공약,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생각을 자기만의 것처럼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아쉬운 것은 지금까지 『그 문제는 내가 아직 잘 모른다. 아직은 그 문제에 확신이 없지만 앞으로 그 방면의 전문가한테 잘 배워서 대처하겠다』고 임기응변이 아닌 솔직한 말로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나라 유권자들은 아는체 뽐내는 정치가들의 말에 쉽게 현혹될 만큼 어리석지 않다. 대선후보들은 좀 더 나직한 목소리로 유권자들 앞에 나서야 한다. 자신의 앎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자세에서 『이 분은 말이 앞서기 보다 일이 앞설 사람같다』는 신뢰가 싹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