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기탁금제 폐지 등 기대에 못미치지만 ‘돈정치’ 악순환 끊는 계기로삼자현대 정치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어떤 인물을 그 사회의 지도자로 선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정치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지혜, 덕성, 몸가짐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최상의 지혜로운 통치자를 고대했던 플라톤이나 수신에서 치국에 이르기 위한 수양법을 제시했던 유가사상가들은 바로 「누구」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근대민주주의가 형성되면서 정치의 중심점은 「누구」보다는 「어떻게」의 문제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어떠한 절차와 방법을 통해서 사회를 통솔할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문제의 중심점이 이동하면서 정치는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 요구되는 것은 실질적 정의보다 절차적 정의이다. 정치적 과정을 크게 둘로 나누어 볼 때, 하나는 한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받을 사람들을 선출하는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이들이 내리는 결정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은 별개의 것이기보다는 상호 밀접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어떤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한 조건과 과정을 통해서 선출된 정치인들에게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정치적 결정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시장의 논리와 구분될 수 있는 정치의 논리이며, 정치제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국회에서 통과된 정치개혁입법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어떤 과제를 던지고 있는가? 개정된 법률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선거운동방식에서의 획기적인 변화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선거운동방식에서 탈피하여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가장 전통적인 정치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옥외 집회를 원천적으로 금지시켰다고 하는 점은 우리 사회에서만 가능한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카리스마를 지닌 정치가의 주술적 언변을 통해서 대중을 압도하고 승복시키는 행위야말로 가장 오래된 근대적 정치의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선거 문화에서 대규모의 대중 집회를 통한 감정이입 과정이 사라지고, 방송네트워크와 통신인프라를 통해 전달되는 입후보자들의 비전과 이미지로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새로운 선거문화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거문화와 제도의 변화를 가져온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그 동안 우리 사회의 활력을 빼앗아 온 비정상적인 정치자금에 있다. 현대자본주의 경제체제 위에서 형성된 정치제도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돈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시장의 논리가 삶의 패턴에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정치자금의 모금이나 후원제도에 있어서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치적 경쟁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번의 법개정에서 그 동안 여당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해 온 지정기탁금제를 폐지한 것은 상당한 진보를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의 선출이나 정치적 결정이 시장의 논리나 특정 기업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모든 정치자금의 입출금 과정뿐만 아니라 후원자의 명단과 이들이 제공한 금액 등이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그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정치인과 정치과정이 시장의 논리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개정 입법에서는 후원금의 상한선과 불법적인 정치자금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비록 이번 개정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수준일지라도 과거의 정치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계기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운동방식이나 정치자금제도의 변화보다 정치인과 국민이 개정된 법률을 철저하게 지키고 그 법률들이 실효성을 갖고서 집행될 때, 비로소 진정한 정치적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건전한 정치제도와 문화는 법문에 있기 보다는 이를 만들어 가려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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