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의원·총재 최다선 등 숱한 기록김영삼 대통령은 7일 신한국당 탈당을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역정과 개인사에 또하나의 장을 기록했다. 26세의 최연소 의원이라는 첫 기록과 함께 우리 정치사에 등장했던 그는 마침내 43년간의 정당인 생활을 마감했다. 김대통령의 일대기는 파란과 곡절, 투쟁과 타협, 영광과 변신등으로 점철돼 왔고 이는 바로 우리 정당의 역사에 그대로 통할 수 있다. 대변인 두번, 원내총무 다섯번, 야당총재 네번에다 여당총재까지 지낸 그의 이력은 김대통령이 우리 정치사 한복판의 산 증인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최다선(9선)의원, 최장수 원내총무, 최연소 총재 등도 김대통령이 정당사에 남긴 기록들이다.
김대통령은 54년 당시 집권 자유당공천으로 경남 거제에서 출마, 3대 민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3선개헌에 반대하면서 야당의 길로 들어선 그는 고비를 맞을 때마다 발휘되는 결단과 추진력, 계무의 승부를 거는, 특유의 파괴력으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 왔다. 소장정치인이었던 그가 한단계 도약의 발판을 만든 것은 40대 기수론. 70년 신민당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기습적으로 제창됐던 40대기수론은 당시 야권을 발칵 뒤집으면서 이후 유신시대와 5공하 80년대에 걸쳐 김대중씨와 함께 소위 「양김정치」시대를 열기도 했다. 승부사의 정치를 즐겨했던 그에게 쓰라린 패배도 많았다. 김대중씨에게 대통령후보를 내줘야 했던 불의의 역전패를 맞본 이후로도 87년 대선에 낙선하고 88년 총선에서는 김대중씨의 평민당에 뒤져 제2야당 총재로 자족해야 했다.
그는 90년 1월 상상을 뛰어넘는 3당합당을 결행, 여당대표로 변신한다. 그후 92년 대통령후보가 되기까지 김대통령은 사활을 건 당내 권력투쟁을 거쳐야 했다. 이 투쟁은 이전에 국민을 업고 독재정권과 벌이던 거리의 투쟁과는 달랐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야당식 투쟁방식을 밀고 나갔고 소수파로서 정적들을 물리치고 집권당의 대통령후보가 됐다. 「대도무문」으로 상징되는 그의 인생철학과 정치적 처신은 「잠시 살기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도 압축돼 있다.
집권후 개혁과 사정의 시행착오속에서 그는 다시 좌절을 맞보기도 하지만 두 전직대통령을 구속시키면서 96년 2월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는 또한번의 승부를 폈다. 결국 김대통령은 선거를 목전에 두고 여권이 분열되는 진통을 다시 겪는 와중에서 「자신이 만든」신한국당 당적을 버렸다. 「중립인」으로서 두게 될 다음 수가 관심을 끄는 것은 이같은 그의 40년 정치역정에서 비롯된다.<조재용 기자>조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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