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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탄식을 들어라/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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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탄식을 들어라/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한국논단)

입력
1997.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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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관료의 무지와 정치인들의 무능으로 한국경제가 이꼴…/이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세계에서 박사가 가장 많은 도시가 어디일까. 보스턴? 아니야, 서울이야』

이 대화는 미국의 인기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래, 서울은 과연 박사의 도시다. 그런만큼, 사회과학의 제왕으로 자처하는 경제학에 통달한 박사도 가장 많을 것이다. 경제학박사들은 학계를 위시하여 민간연구소와 관계에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다. 그런데 경제가 왜 이 꼴인가.

장기화한 경기침체 끝에 드디어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에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정부의 전문가들은 시장조정 국면이라고 조금 더 참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는 동안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국제신용도가 하락하고 외국자본이 빠져나가고, 급기야는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예외조항으로 간주하는 흑자도산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경제성장을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가. 지난 30년동안 지긋지긋하게 지속된 억압의 세월과 농촌을 떠나 산업공단에 몸바친 수많은 노동자들의 청춘을 생각해보라. 이런 대가로 얻은 경제발전을 망치고 있으면서 조금만 참아달라고? 우리의 경기침체는 시장을 황금같이 신봉하는 경제관료의 무지와 정치인들의 무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기업자금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시중의 돈이 산업자금화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며, 기업경쟁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업활동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는 정치판이 문제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의 위기가 중첩되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 이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러니 제발 들어 보아라.

첫째, 적자재정을 편성하여 자금을 풀고, 은행의 여신업무를 정상화하여 금융시장의 반란을 막아라. 규제완화는 노동시장과 생산시장에는 필요한 조치인 반면, 금융시장은 시장의 실패가 발생하기 쉬운 가장 민감한 영역이므로 항시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본은 유난히 이동성이 커서 단시간 내에 이윤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몰리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침체시 적자재정을 편성해서라도 유효수요를 창출하라는 것이 케인스주의의 제1 명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적자재정에 쓸데 없는 공포심을 갖고 있다. 박정희체제가 인플레와의 전쟁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막대한 차관을 끌어썼기 때문인데, 지금은 사정이 판연히 다르다.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하는데, 정부만 흑자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 한보사태 이후 산업자금으로 쓰여야 할 은행의 돈이 생활자금과 소비자금으로 대부분 방출되고 있다. 위험부담이 작은 곳으로 쏠리는 금융기관의 단선적 행위 양식을 시정하는 과단성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둘째, 금융실명제를 6개월간 유보하여 지하에 동면하고 있는 막대한 돈이 산업자금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주라. 김영삼 정부의 제1의 치적을 무산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금융실명제의 후유증을 최소화하자는 뜻이다. 실명화하지 않고 있는 수조원의 지하자금을 산업기금화하여, 특히 자금압박에 처한 중소기업들이 향후 5년 정도 저리융자로 쓸 수 있도록 특별조치를 취하라.

셋째, 식당과 주유소 등 소비산업에 과투자되는 돈을 유인하여 산업기금화하는 제도를 만들라. 용도를 찾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는 막대한 규모의 퇴직금을 흡수하고 동시에 퇴직자들을 투기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고금리투자기금을 창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권이 대선을 겨냥하여 소모전을 벌이는 동안 한국경제는 정책부재로 휘청거리고 있다. 규제완화가 만병통치약인양 떠들어댔던 현정권이나 정책실패를 꼬집어 온갖 흠집을 내고 있는 야당이나 모두 어렵게 쌓아온 성장을 축내고 도약의 기반마저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데에 대부분의 국민은 주저없이 동의한다. 대선만 끝나면 모든 소용돌이가 해결된다고 현혹하지만, 쌓는 것보다 허물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훨씬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니 제발, 국민들의 탄식을 귀담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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