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대군 두번 물리친 충신의 나라/땅은 넓고 물산도 많으며 군대도 막강/단군도 요임금과 같은 시기 즉위”/중 엘리트관리와 대담서 굽힘없는 주장만리장성은 우주선에서도 보인다고 한다. 그런만큼 중국하면, 먼저 만리장성이 떠오른다. 대운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대운하는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찬란한 역사유적이다. 항저우(항주)에서 베이징(북경)에 이르는 길이 1,700여㎞의 인공수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운하다. 일찍이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치기 위한 병참선으로 판 것인데 수의 멸망에는 이 운하건설도 한몫했다. 수 많은 백성의 피와 땀의 대가로 건설된 「비극의 운하」는 여전히 중국의 내륙을 잇는 대동맥 역할을 한다.
최부 일행은 1488년 2월13일 항저우에서 운하의 뱃길로 북행길을 떠난다. 3일째 되는 날, 자싱푸시수이(가흥부서수)역을 지날때 역승(역장) 허룽(하영)은 최부 일행에게 닭, 문어 등 찬거리를 보내면서 시 3수를 지어보냈다. 최부도 화답했다. 허룽은 『우리나라의 「황화집」에 조선인 서거정의 시가 실려 있소. 「명나라 황제가 조선이 어떤 곳인가 물으면/ 문물, 풍속이 중국과 같다고 말하겠소(명황약문삼한사 문물의관상국동」 라는 구절이 있는데 평생 처음 조선인인 그대를 만나니 참 반갑소』라고 했다. 말단 관리와 남루한 조선선비간의 평생 한번 뿐인 짧은 조우는 「황화집」이 계기가 됐다.
최부는 장수(강소)성 수저우(소주)에 도착했다. 수저우는 항저우와 더불어 강남의 대표적 상업도시이며 이름난 예의 고장이다. 명나라 때 서화의 대가 탕인(당인), 선저우(심주), 원쩡밍(문징명), 치우잉(구영) 등 이른바 오문사가(오문사가)는 모두 여기 출신. 운하의 수로가 모세혈관처럼 뒤엉킨 수향으로 동양의 베니스라고 불리며 일찍부터 원림이 발달해 류위엔(유원), 주오정위엔(졸정원) 등 명원이 즐비한 명승지이다. 최부는 수저우 서쪽의 운하에서 동북으로 쉬장(서강)을 따라 수저우 서남단에 도착, 쉬장과 합류한 외성하(네모꼴 수저우성을 둘러싼 해자)를 북쪽으로 올라가 쉬먼(서문·수저우성의 서남문) 밖 역참 구수(고소)역에 머물렀다.
때마침 이곳에 체류 중인 명의 빼어난 관리 순안어사 왕, 송 두 사람이 최부를 초청해 대담한다. 우선 조선의 역사가 펼쳐진다. 최부는 사론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 조선역사를 자랑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 즉 관념의 자아가 육신의 자아로 바뀐다는 말이다. 하물며 자부심강한 최부의 경우야 말할 필요가 없다. 최부는 중국땅에서 중국인과 생활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자아로 변모하는 정신의 궤적을 그린다.
최부는 당시 조선의 젊은 지성을 대표하는 이른바 신진사류이며 동국통감 등의 국사편찬 사업에서 중국문명에 경도하는 사론을 많이 썼다. 동국통감 첫머리 「단군조선」 대목의 사론에서 최부는 『단군의 즉위가 중국의 요 임금보다 25년 뒤진다. 옛 기록의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했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표류 뒤에 사오싱(소흥)에서 황중(황종)에게는 『분명히 단군은 요와 함께 더불어 즉위했다(단군여당요병립)』고 말해 동시성을 주장한 것이다. 기년의 동시성은 가치의 동시성을 의미한다. 고난 중의 선지자처럼 최부도 조선인으로서 깨닫고 그리고 성장한다.
최부는 한밤에 구수역을 출발, 송나라 원풍 연간(1078∼1085)에 세운 고려정(명나라 때 이름은 통파정)에서 일박했다. 『거리는 인가가 밀집하고 운하에는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다. 서쪽에는 당나라 시인 장지(장계)의 시 「고소성외한산사」로 유명한 한산사의 높은 탑이 보인다』 최부의 기록이다. 운하 끝에는 한산사의 모습이 우뚝하다.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서문 앞을 돌아 한산사로 짧은 여행을 했다. 운하에는 배들이 쉴새 없이 오르내리며 운하양쪽에는 민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지나가는 배는 아랑곳 없이 구정물을 쏟아붓는가 하면 식구가 마주앉은 정겨운 식탁풍경도 엿보인다.<박태근 관동대 객원교수(수저우·소주에서)>박태근>
◎표해록의 가치/광범한 문화적 함축성과 풍부한 내용/‘동방견문록’‘입당구법순례행기’ 능가
최부가 밟은 중국땅의 5분의 4는 그때까지 조선인이 가 본 적이 없었던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니만큼 최부는 표해록에서 명나라(홍치 초기)의 해금(항해나 해상 출입을 금하는 것)과 해안방비 상황에 대해 중국인도 놀랄만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중국남부 교통요지인 경항대운하가 관통된 후 맨 처음으로 전구간을 다녀간 조선인으로서의 견문, 조선시대 공식사절단이 작성한 「조천록」이나 「연행록」보다 더 깊고 풍부한 중국풍물과 민속에 대한 기록, 표류사건 당사자로서 경험한 표류안심리의 절차 등은 모두 귀한 문헌·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표해록」의 광범한 문화적 함축성과 풍부한 내용, 그리고 중국에 대한 인식은 그동안 중국견문록을 대표해 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일본 스님인 옌닌(원인)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능가한다.
「표해록」은 조선조에 다섯 번이나 간행됐다. 주로 표해록에 담긴 정신가치와 사회적 효용성을 고려한 출간이었다. 최부는 품행과 절개를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단정히 하는 전형적인 선비였다. 그의 품행이 사람을 감화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표해록」에는 생사, 충효, 정의, 공사, 이타와 이기, 그리고 인격과 국격 등 주요한 인간문제들이 집중돼 있다.<거쩐자 베이징대 한국학연구중심 교수>거쩐자>
◎표해록 초/“조선선비들은 사서오경과 주자학을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2월14일=한선(한신)이란 관리가 내게 물었다.
―당신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여기에 있는 줄 아시오.
『어머니께서는 망망대해에서 내가 물고기 밥이 된 줄로 알고 계실 것이오. 이처럼 어머니를 상심케하니 이보다 더 큰 불효가 어디 있겠소. 이제 귀국의 후의를 입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모자가 만나게 되면 상견유승수하의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오』
2월15일=역장 허룽(하영)의 시에 화답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낭중(낭중) 치순(기순)과 행인 장진(장근)은 조선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는데 「황화집」을 저술하였소. 그가 조선사람들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 서거정이 첫머리에 나오더군요… 서거정은 무슨 관직에 있소.
『의정부 좌찬성직에 임하고 있소』라고 대답하자 그는 서거정의 문장 역시 해동의 인물이지요라고 말했다.
2월17일=수저우(소주)는 오나라 왕 합려가 오자서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여 도읍한 곳이다. 정오에 성이 각각 왕·송이라는 관리가 찾아와 문답을 나누었다.
―당신은 몇품이오. 시를 지을 줄 아시오.
『5품관이오. 우리나라 선비들은 사서오경을 연구하고 주자학을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소. 그러나 풍월을 읊조리는 것을 천시하기 때문에 나 역시 시가는 배우지 않았소』
―기자가 조선으로 갔는데 그 후예는 있소.
『기자의 후손인 기준은 위만에 쫓겨 마한으로 도망하여 도읍했으나 백제에 멸망당했으며 지금은 후사가 없소』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 수와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모신과 맹장이 병사를 지휘하는 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사들은 한결같이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그 때문에 백만대군이라는 수와 당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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