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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진료실은 ‘사회의 창’/정치혼란·부도사태·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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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진료실은 ‘사회의 창’/정치혼란·부도사태·입시…

입력
1997.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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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사회,누구나 잠재환자 약물로 증상을 감소시키고 상담으로 사기 올려주며 문제파악 능력키우기가 치료정신과 진료실은 세태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인생사의 슬픔, 분노, 억울함, 배신감, 당황함, 불안, 우울이 진료실에 메아리친다. 정신과 의사는 그 메아리를 귀 기울여 듣고 의미와 해법을 제시하는 관찰적 참여자이다. 정신분열병과 같은 심한 환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달리 진료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증상이 가벼운 환자들이다. 정신병과 같은 심각한 질환은(그 중에서도 상당수는 치료 후에 거의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드물고 부부간, 가족간,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문제들에 지쳐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매우 역동적인 사회이다. 그 역동성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정치판의 적나라한 적개심, 분노, 공격성은 일반 대중의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경제 불안정에 따른 명예퇴직과 조기퇴직, 끝없는 주가폭락, 부도의 영향은 개인과 가족의 미래에 말할 수 없이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때로는 가장이나 가족 전체의 자살, 이혼이나 별거 또는 가출에 따른 가족 체계의 붕괴로 이어진다. 생활 속에 문화적 태도가 빈곤하니 사람들은 세상을 관조하는 능력이 부족해 눈앞의 현안에만 매달려 한치 앞을 벗어나지 못한다.

흔들리는 학교교육과 대학 입시 경쟁은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들을 마치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과 같이 몰아친다. 일부는 탈선해 비행을 저지르거나, 우울증에 빠지거나, 심지어 자살한다. 상당수는 국내외 연예인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 심리적 동일화로 청소년 시기의 정체성 정립에 어려움을 겪는다.

60대의 A씨는 흔들리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신사복 차려입고 도시락을 싸든 채 남산으로 올라가 퇴근시간까지 버티는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나타난 우울증은 매우 괴롭다. 심신이 모두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이 때 신속한 정신과 치료는 매우 중요하다. 정신과 의사는 우선 약물을 통해 증상을 감소시키고, 상담으로 사기를 올려주며, 문제를 파악하는 힘을 길러주는 일을 한다.

50대 주부 B씨는 남편과의 관계청산여부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하며 고통받고 있다. 남편은 술만 마시고 들어오면 주사를 심하게 하고 가끔은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러 팔이 부러진 적도 있다. 마음속으로 이혼을 밥먹듯이 생각해 보았으나 어린 아이들이 걸려 결국 이제까지 살아 왔다. 아이들이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제 갈 길을 간 요즈음 남편의 행패는 줄어들었으나 『고생하며 참고 이제까지 살아 온 내 인생은 어디에서 보상받는가』하는 생각에 불면과 우울이 찾아와 견딜 수 없어 한다. 『이제 더 이상 남편과 아내간의 수직적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고 세상에서 떠드는 것과 달리 많은 아내들이 아직도 가정 폭력의 대상으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을 버텨주던 「자식만 잘 키우면…」의 전통적 가치도 신세대의 등장으로 이제 보상받을 길이 없다.

정신과 의사의 하루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이 맺힌 환자들이 털어놓는 사연은 강력한 에너지로 의사를 끌어당긴다. 바로 코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이 겪어온 인생의 굴곡을 이야기하는 환자에게 인간이라면 모두 애틋한 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 좋은 이웃 사촌이나 친구의 역할로 끝나서는 안된다.

환자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어느 면에서는 냉철하게 분석하고 때로는 환자에게 아픈 이야기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렇게 맞고 살면서도 남편과 수십 년 같이 살아 온 이유가 진정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식의 질문도 때로는 환자 자신이 피학적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하다.

대부분의 정신과 환자들은 마치 얕은 우물에 빠진 사람들과도 같다. 우물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손바닥만 해 절망스럽지만 한 발자국만 나서면 넓고 밝은 세상이 눈앞에 전개된다. 환자의 안목을 넓혀주는 작업이 정신과 의사의 몫이다.

안정되지 못한 사회는 정신과 의사를 어렵게 한다. 불안한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문제들이 더 흔히, 더 크게, 더 극단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의 눈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모순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들 중 일부는 글과 말로 이를 바로잡으려 애쓴다. 다른 이들은 예술에 몰두한다. 세상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들이 「잡기」에 능하다고 평한다.

아무리 고도로 훈련받은 정신과 의사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지나친 감정적 교감에는 결국 지쳐 버린다. 따라서 퇴근 후엔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때로는 아주 뻔한 이야기의 활극 비디오에 몰입한다. 심각한 영화나 소설은 사실 보기가 싫어진다. 진료실에서 벌어지는 진짜 인간 드라마에 못미치기 때문이다.

정신과에서 다루는 정신 증상들, 즉 불안, 우울, 지나치게 기분 좋음, 불면, 공포 등은 소위 정상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모두 경험하는 것들이다. 단지 너무 오래, 너무 심하게 나타나 환자들을 괴롭힐 뿐이다. 정신과 환자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들이 무좀으로 괴로워 할 때 그들은 우울증으로 힘들어 할 뿐이다.

정신과는 인생 상담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불쑥 또는 숨어 나타나는 감정적, 행동적, 대인관계 문제를 다루기 위한 곳이다. 겨울철 버스 안에서 김 서린 안경 때문에 잘 보이지 않던 세상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면 환히 보이는 경험을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정신과에서 하고 있다. 정신과는 마음의 눈을 뜨도록 도와주는 전문시설이다.

정신과가 단순히 심리적 문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뇌 기능 및 신체기능의 이상과 연관된 기질성 수면장애, 정신신체장애, 기억력 장애, 긴장성 두통, 기질성 정신장애, 치매 등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정신과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정신과 전문의 입장에서 보면 치료받고 있는 정신과 환자보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치료조차 받지 않고 있는 소위 정상인 중 일부가 더 큰 문제이다. 목소리 크고 우긴다고 다 정상은 아니다.

◎정신적 고민 대처법/좋은 친구에 도움청하거나 믿음직한 의사와 상담을

정신 증상에는 전문가가 반드시 옆에서 도와주어야 할 부분과 본인 스스로의 노력이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우선 고민과 갈등은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통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은 고통, 갈등, 고민, 불안, 우울을 먹고 성장한다. 세상의 번뇌가 전혀 없는 「진공 상태」에서는 몸이 자랄 수는 있어도 마음의 성숙함은 얻을 수 없다. 정신적 방황은 성숙한 인격을 성취하기 위한 기회이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좋은 친구란 최대한 객관적 입장에서 상대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되 그 것을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역경에 처한 친구가 남몰래 털어놓은 사연을 떠벌리고 다니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은 당연히 좋은 친구가 아니다.

문제는 사전에 누가 좋은 친구이고 아닌지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정신과 전문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상담하기에 적절한 사람들이다. 잘 듣고 잘 말 할 수 있는 훈련을 오랜 세월 체계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따라서 초면에 어쩐지 꺼려지는 의사에게 반드시 계속 다녀야 할 의무는 없다. 자신에게 오는 느낌도 중요하다.

의사가 자신을 존중해 주는 지도 생각해 보라. 자신을 존중해 주지 않는 의사에게 습관적으로 다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치료의 대상이다. 「신경성」이니 무조건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의사에게도 갈 필요가 없다. 신경이 자꾸 쓰여서 간 것인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병적 증상과 정상범위내의 정신적 방황을 감별하기는 쉽지 않다. 가족이나 본인은 증상을 가능하면 일시적이고 정상적인 소견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조기진단은 정신질환의 치료에 매우 중요하다. 일찍 알면 쉽게 고칠 일을 좋게만 생각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안타깝게도 너무 많다.<정도언 서울대 의대 교수·정신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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