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대표도시 항저우의 행정·군사·지리·풍속 등 낱낱이 기록/“사람들은 거의 상업에 종사하며 고관대작조차도 푼돈을 따진다”/실사구시 정신으로 ‘경세의 서’ 승화항저우(항주)에서 최부는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경이로운 세계와 조우했다. 바로 항저우의 도시문화와 상품경제였다. 명제국의 선진경제 지역은 이른바 「강남」이고 강남의 대표 도시가 항저우다. 이 때보다 90년 뒤인 1578년 통계를 보면 저장성의 인구밀도는 전국 1위, 농지면적은 강남지역이 전국의 4분의 1, 농세는 전국의 45%를 차지했다. 풍요한 농업생산을 바탕으로 비단, 면포, 도자기, 차, 제지, 잡화 등 각종 수공업과 유통업이 발달해 명제국 초기 자본주의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사람들은 압도적인 이문화를 만나면 보통 두 가지 패턴으로 대응한다. 거부감으로 외면하거나 아니면 현실의 도전을 관념으로 극복한다. 뒷날 조선조 선비들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새로운 상품과 문화를 만났을 때 거의 모두가 성리학적 정신주의로 도피, 겨우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실학의 고고의 소리를 듣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최부는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몸소 경험한 상품·도시문화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낱낱이 기록, 「표해록」을 파란만장의 이야기 책이 아니라 「경세의 서」로 승화시켰다. 『사람들은 거의 상업에 종사하며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소매 속에 저울을 넣고 다니며 푼돈까지도 따진다』 명의 선진적 상품경제를 요약한 대목이다. 명제국의 행정 군사 지리 경제 풍속 등에 관한 최부의 다양한 관찰과 서술은 꼼꼼하고 자로 잰 듯 정확해 마치 정교한 5만분의 1 지도를 보는 느낌이다.
최부는 항저우에 7일 간 체류했지만 바깥나들이를 삼가고 역관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두 번씩이나 저장성 고관의 예방을 받았다. 첫 손님은 저장성의 교육감격인 안찰제조학교부사(정 4품관) 정. 정은 조선의 과거제도 등에 대해 문답을 한 후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한 선비』라고 치하했다. 최부는 정의 호는 「둥위엔즈(동원자)」, 재명(서재이름)은 「푸짜이(복재)」라 했으나 정작 이름은 잊어 정대인이라 적고 있다. 「명실록」을 보면 이름은 정지, 전해인 1487년 3월 중앙의 한림원검토관에서 첨사(정5품관)로 부임해 왔다. 최부의 기록은 늘 그렇듯이 정확했다.
두번째로 저장성의 지방장관인 포정사(종2품관) 쉬꾸이(서규)와 안찰부사(정4품관) 웨이푸(위부)가 찾아와 『곧 귀국하게 되니 안심하라』고 위로했다. 하루는 역리 구비(고벽)가 시산(서산)의 고려사 이야기를 꺼냈다. 송나라 때 고려사람이 세운 절인데 절 앞마당에는 오래 된 비석이 두 개 서 있단다. 최부는 불교는 이단이라며 고려사를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만약에 기록을 남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쉬운 일이다. 고려사는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의 신심과 고려의 후원으로 이뤄진 한중불교문화교류사상 우뚝한 사찰이다.
항저우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최부가 마다 한 고려사를 500년 뒤에 찾아 나섰다. 숙소는 시후(서호) 북쪽의 황룽반점(황룡반점). 호수 서쪽의 서산로를 남쪽으로 한참 달리다 거의 끝날 무렵 오른쪽에 나지막한 구릉과 시내에 둘러싸인 대나무가 우거진 아담한 분지가 나타난다. 바로 고려사 옛터이다. 지금은 객실 150실의 화가산장이라는 리조트호텔이 들어 서 있다. 번지는 시산루파시앙시앙(서산로법상항) 11-1호. 지명부터 불교내음이 물씬하다. 지배인 장궈주(장곽주)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그의 안내로 이곳 저곳 소상하게 둘러 봤지만 옛모습은 전혀 찾을 길 없다. 다만 눈길을 끈 것은 근자에 출토된 석상 한 구. 떨어져 나간 머리는 별실에 보관하고 몸통은 창고 처마 밑에 세워 있었다.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엄항섭이 발굴한 대각국사상이 아닐까 하고 일순 흥분을 금할 수 없었지만, 모습이 닮지 않아 아쉬웠다. 쑤둥퍼(소동파)상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정교한 솜씨가 아니다. 『만나면 헤어지고 태어나면 죽기 마련인가!』 문득 무상의 바람이 일어 돌아서는 발길에 낙엽이 우수수 날린다.<박태근 관동대 교수(중국 항저우·항주에서)>박태근>
◎항저우의 고려사/927년 건립… 대각국사가 중창/고려왕실 도움으로 거찰로 발전
고려의 대각(1055∼1101)국사가 중창한 고려사는 본래 이름이 혜인사로 927년 오월국 시절에 세워졌다.
대각국사는 고려 문종의 넷째왕자로 11세 때 출가, 고려불교에서 천태교학을 대성한 고승이다. 그는 고려와 송의 불교문화교류를 위해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혜인사 즉 고려사가 그 빛나는 가교이다. 혜인사와의 만남은 1085년 송나라의 구도유학 길에 항저우로 와서 혜인사의 징위엔(정원)을 사사하면서 비롯된다.
국사는 귀국 후 1087년 징위엔 스님을 흠모한 나머지 고려 특유의 아름다운 화엄사경(감지, 쪽빛 종이에 금물로 쓴 것) 170권(50권본, 80권본, 40권본)을 기증했다. 징위엔이 열반하자 1087년 추모사업으로 금탑 두 개를 보냈고 1099년에 고려가 보낸 화엄경의 장경각건립비를 희사했다.
이렇게 국사와 고려왕실의 도움으로 혜인사는 항저우 굴지의 거찰로 발전했고 사실상 고려의 절이므로 고려사로 불려진 것이다.
당시 항저우 지부인 쑤둥퍼(소동파)는 고려와 혜인사와의 우호관계를 끊으려고 획책했지만 고려의 뒷바라지는 끊이지 않았다. 고려멸망 후 유력한 후원자를 잃은 혜인사는 사세가 기울었으나 명 청 때에도 존속했으며 1757년 법운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뒤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역사적인 재발견의 소식을 알린 것은 1923년 독립운동가 엄항섭이 펴낸 「고려사」라는 글이다. 1917년 신규식의 동생 신건식의 노력으로 법운사가 다시 고려사라는 이름을 되찾게 됐다. 정작 고려사의 모습은 초라했다. 국사상을 모신 허름한 민가같은 본당, 예닐곱칸 살림집 등 이것이 전부였다. 지금은 그나마도 지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엄항섭은 절규한다. 『각하라, 고려의 승려들아』
◎표해록 초/“조상에게 제사 지내지만 귀신은 음사라 하여 섬기지 않소”
2월10일=구비(고벽·항저우의 관리)가 찾아와 말했다. 『베이징(북경)에 가려면 길을 몰라서는 안되오. 베이징으로 가는 운하는 매우 좋소. 그래서 일본 섬라 만자 등에서 조공을 위해 오는 배는 한결같이 복건 포정사의 지시에 따라 이곳 항저우에서 일시 정박한 뒤 사오싱(소흥)에 이르게 되오. …양자강은 항저우에서 천여리쯤 되는 곳에 있소. 물결이 사나워 풍랑이 없어야만 건널 수 있소. 그 강을 건너면 베이징까지 가는 운하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서 40일 걸린다오』 그리고 죽순을 주면서 『변변치 못한 것이지만 잡수시오. 귀국에도 이 같은 죽순이 있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우리나라에서는 5월이나 되어야 생산된다고 답하자 그는 『이 지방에서는 겨울 봄 할 것 없이 생산되오. 정월에 한창인데 큰 것은 10여근이나 나간다오』 라고 했다.
2월11일=구비가 다시 찾아와 항저우 서쪽 팔반령에 있는 고려사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그러나 지금 우리 조선은 불교를 이단시하고 유학을 존중하고 있소.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벗에게는 신의로써 대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소. 만약 중이 되려는 자가 있다면 군대로 보내 버린다오』라고 답했다. 『불교를 섬기지 않으면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네 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섬기고 있는 게 아니오』라고 구비가 물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당을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귀신은 음사라 하여 섬기지 않소』라고 말했다.
2월12일=구비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옷을 벗어주려고 하자 정보 등이 만류했다. 나는 『옛날 사람들 가운데는 옷 한 벌로 30년 동안 입은 이가 있네. 나는 타향 객지에 있은 지 불과 1년이네. 이제 날도 점점 더워지고 있으니 한 벌이면 족할 것이네. 뱀이나 물고기 같은 미물도 은혜에 감동하면 보답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라고 옷을 벗어 주니 구비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다시 『친구가 주는 물건은 비록 거마라 하더라도 인사를 하지 않는 법이거늘 이 같은 옷가지쯤이야! …이별에 임하여 떠나는 사람이 옷을 주는 것은 곧 옛 사람들의 뜻이라오』고 말하자 구비는 옷을 받았다.<최기홍 역 「표해록」에서>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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